(두만강)두만강 푸른물에 검은 눈물을 보태어 흘려보내니


- 언제 : 2005.8.2
- 얼마나: 07:33~09:08
- 날 씨 :흐림과 맑음이 교차
- 몇명:33명
- 어떻게 : 부산 산정산악회(http://mysanjung.co.kr) 따라서
- 테마:탐사여행




두만강 발원지에서 상류의 끝부분인 무산까지 흐름을 따라 내려가면서 두만강을 바라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작년에 일제시대부터 ‘민족의 노래’로 불렸던 ‘눈물 젖은 두만강’( 김정구 노래)은 공산주의 운동가였던 박헌영(朴憲永)을 소재로 한 노랫말이라는 주장이 나왔다.(임경석, 『이정 박헌영 일대기』, 역사비평사, 2004. 4)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곡자 이시우와 달리 작사자 김용호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통상 1930년대 중엽 극단 ‘예원좌’의 이시우가 항일투쟁에 참가했다가 총살당한 남편을 둔 한 여인의 사연을 듣고 이 노래를 지었다고 알려졌다.

현지 가이드 설명으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작사자와 작곡자가 연변 출신이라는 것이다.작사자는 알려진 바가 없어서 그렇다치고 작곡자 이시우는 거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북한에선 작사자는 북한의 시인 한명천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다.

남한에서는 김용호가 이 가요의 작사자로 기록돼 있으나, 그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인적사항조차 밝혀지지 않고 있다. 지난 99년 6월 흘러간 옛 가요를 CD로 발매한 신나라레코드사의 이태규 상무도 “<눈물 젖은 두만강>의 작사자는 김용호로 알려졌을 뿐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밝혔다.

다만 일제시대 대중가요 작사자들이 가명을 사용한 시인들이 많았던 점으로 미루어 한명천과 김용호가 동일인일 가능성은 있는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한명천은 1940년대 후반 북한정권 초창기 시절 왕성한 활동을 한 시인으로 그의 대표작인 「북간도」는 북한에서 아직도 조기천의 「백두산」과 함께 북한문학사에서 ‘2대 서사시’로 평가받고 있다고 한다.

여하튼 민족의 애환이 담긴 이 노래를 부르며 두만강으로 따라 버스를 타고 같이 흘러가는 경험을 할수 있어 의미 깊었다.


07:33
등소평의 글씨가 있는 백두산 북파산문 근처인 천지호텔에서 버스를 타고 두만강 발원지로 향한다.



09:08
두만강 발원지에 도착했다.이곳 물은 맑았다.가이드 말로는 두만강을 4가지로 부른다고 한다."두만강,도문강,
도망강,똥물강"이라는 것이다.

현지가이드는 연길사람이니 중국사람이다. 그래서 도문강=토문강=두만강으로 역사왜곡을 하는 중국의견에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하지만 "도문강과 두만강은 별개의 강이다"라는 육사신보의 내용을 옮겨보면 이렇다.

청황제 강희제는 우리측이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청황제의 명을 받은 鳥喇總管 穆克登에
의해 1712(숙종 38) 5월 15일 백두산에 조·청 국경의 정계비를 건립하였다. 이 정계비문에는
鳥喇總管穆克登奉旨査邊至此審視西爲鴨綠東爲土門故於分水嶺上勒石爲記康熙五十一年五月十五日
筆帖式蘇爾昌通官二哥朝鮮軍官李義復趙台相差使官許梁朴道常通官金應憲金慶門
(비석의 크기는 높이 2尺 5寸 5分 폭 1尺 8寸 3分)이라고 새겼다. 목극등은 정계비의 건립처가
압록·토문 양강 분수령이라고 하는 곳에 세워 압록강은 입비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발원하였으므로 아무런 이의가 없는데, 동위 토문은 동측에는 유수가 없고 상당히 먼곳에
용수가 있는데 목극등은 이 물이 백두산으로부터 북류하여 온 토문 상류라고 했다. 문제가 된 것은
토문강이라고 하는 물이 우리가 말하는 두만강으로 합류했다면 문제가 없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 토문강 상류는 송화강의 상류인 것이 확실하므로 송화강의 상류인 것이 확실하므로 토문강이
즉 두만강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170여년이 흐른 1882년 길림장군이 우리 조정에 공문을 보내 두만강 이북에 거주하는 우리 국민을
그 이남으로 소환해 가라 했고, 다음 해에도 똑같은 공문을 보낸 데에서 발단이 되었다.

청국측의 이러한 요구가 있음에 대하여 우리 조정에서는 1883년 어윤중을 서북경략사로 삼아
그 실정을 조사케 했다.

어윤중은 두 차례나 백두산 정계비가 있는 곳에 사람을 보내여 정계비 탁본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있고, 사진은 백산학회에 소장되어 있다)을 만들고 토문강의 원류를 답사하여
이것을 조정에 보내면서 문제의 간도 일대는 한국 영토임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러나 청국측에서는 토문강은, 즉 두만강이므로 두만강 이북은 청국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양국간 주장이 다르므로 1885년 우리 측에서는 안변부사 李重夏·趙昌植이,
청국 측에서는 德王·賈元桂·秦煐 등이 백두산 정계비와 토문강 상류와의 연결지대를
공동조사하였다.

그 결과는 우리 주장에 부합되었다. 즉 토문강은 송화강 상류의 한줄기로서 두만강과는
완전 별개의 것이며, 토문강 상류와 정계비 사이에는 돌무더기 흙무더기 또는
나무로 경계를 설치하였던 흔적이 남아있고, 두만강의 발원처는 정계비와는 백여리나
떨어진 곳이므로 두만강을 절대로 정계비에 의한 국경이라고 할 수 없다.

목극등이 정계비를 건립하고 우리의 사신에게 "너의 나라가 많은 땅을 얻었다"고
말했다는 우리측 기록으로 보아 비문에 동위토문이라고 한 것이 실재한 토문강을
말한 것이지 두만강 상류로 오인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혹시 목극등이 토문강이 그 하류에 가서 두만강이 되었으리라고 잘못알았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청국대표인 목극등의 잘못이지 우리의 잘못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토문강이 국경이라고 주장할 권리가 있는 것이고 청국은
우리의 주장을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청국은 토문을, 즉 두만강설을 고집하고 중국 발음이 토문이 두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土門과 圖門 글씨 자체도 다르고 지역상에서도 엄연히 토문과
두만이 따로 있다고 주장을 하니까 또 백두산 정계비를 우리 나라 사람이 토문강 쪽으로
옮겼다고 생고집을 부렸다.

그로부터 1931년 7월 29일 09시 ∼ 그 다음날 29일 오전 사이에 정계비는
누군가에 의해 없어졌다.
1909년까지는 아무런 결말을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은 1909년 만주의 다른 이익권을 얻기 위해 청국 정부와 간도협약이란 것을
체결하여 간도가 청국 영토임을 인정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행위는 1905년의 한·일 조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한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간도 협약을 인정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1965년 한·일 국교가 재개될 때 기본조약 제2조에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과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되어있으므로,
1905년의 외교권 이양도 물론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되어 있으며, 이 조약이 무효가 된다고 하면
이 조약에 인하여 체결된 간도 협약도 당연 무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남북한이 통일되는 날에는 이 국경문제가 다시 거론되어야 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중국이 백두산 천지 중심으로 양분된 것은 정계비에 의한 국경협정을 무시해버리고
두만강 국경설을 확정지을려고 한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금 우리로서는 간도문제를 역사상의 간도로 볼 수 없다. 현실적으로도 직결되는 문제인만큼
어떠한 준비가 있어야 할 줄로 안다. 중국과 수교시 중국에서는 간도문제로 인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와 개방정책 이후 연변조선족 자치주에 80만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었는데, 지난 53년 7월 1일 현재 60.17%였던 조선족이 90년 조사에 39.5%로 떨어졌다.

2천년이 되면 불과 20%정도 거주하지 않나 싶다. 한때 중앙정부에서 영웅대접을 받던 조선족은
이제 뒷전으로 물러나 있다.

우리 정부에서는 무엇을 했는가? 한번 짚고 넘어갈 문제이다. 수교에만 급급했지 간도 영유권에
대해서는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도망강"은 탈북자때문에 생긴 말이고 "똥물강"은 어떤 연유인지 모르겠으나 발원지를 지나서 하류로
내려갈수록 혼탁해지는 강물의 빛깔 때문이다.

두만강 발원지는 북한과 중국간 자동차 밀수가 횡횡해서 콘크리트 장애물이 설치되어 있고 북한과 중국의
공동경비구역 사이에 위치한다.야생화가 만발한 이곳에서 담배를 가져가라고 북한군을 부르면 가지러
온다고 한다."담배 가져 가시라이요"라고 가이드가 큰소리 치면 오는데 당일은 높은 분이 시찰을 나왔는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물은 얼음처럼 차고 물의 속도는 빠르게 돌이치며 흐른다.



09:29~57
끝 없이 이어지는 비포장도로는 중국령이고 우측 두만강 건너편은 북한령인데 이런 흐름이 계속 이어진다.
도로를 따라 30여분 내려가니 경비초소가 보이는 지점에 김일성 낚시터가 있다.북한에서는 중요한 유적지로
관리하는 모양이다.물은 맑고 물속도가 빠르다는 점 외엔 별로 특이한 점은 없는 곳이었는데 낚시가
잘되는 곳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0:52
광평휴가촌(식당) 가기 전 좌측으로 길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좁은 폭의 두만강 너머 북한가옥과 농사일을
하는 북한주민들이 보인다.이곳의 두만강 물은 쇳물같이 불그스럼하게 혼탁해져있고 물의 촉감도 끈적하다.








12:40
중국군인들은 길목에 약간명 있을 뿐이지만 두만강 건너편 북한초소는 50M 간격으로 설치되어 있다.
숭선세관으로 가는 길의 산세가 굉장히 빼어나게 아름다운데 비포장 길이지만 상대적으로 피곤하지 않은
길이 이어진다.숭선세관 건너편 북한의 무산세관엔 인공기가 펄럭이고 두만강 사이에 다리가 놓여져 있어
중국과 북한 사이의 교역의 가교역할을 한다.

마을 뒤쪽 산세도 볼만한데 이후 용정으로 넘어가는 길의 산세는 더욱 빼어나게 아름다워 버스를 타고
눈으로만 쳐다보는 여행도 해볼만 한 경험이었다.







눈물젖은 두만강

작사 김용호
작곡 이시우
노래 김정구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옛날에
내님을 싣고

떠나간 그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임잃은 이사람도
한숨을 지니

추억에 목메인
애달픈 하소

그리운 내님이여
그리운 내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예나 지금이나 두만강은 설움이 많은 곳이다.고향을 버리고 두만강을 건너는 탈북자의 눈물까지 더하니....
그 애환을 덮허버리려는지 키 큰 자작나무 숲들이 밀림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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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모든 것 속에서 자신을 만난다.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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