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


- 언제 : 2005.8.2
- 얼마나: 16:00~17:12
- 날 씨 :흐림과 맑음이 교차
- 몇명:33명
- 어떻게 : 부산 산정산악회(http://mysanjung.co.kr) 따라서
- 테마:답사여행




용정은 반일운동의 근원지였다.비암산,일송정,용문교,용주사,선구자,윤동주,사이섬,이상설,서전서숙,김약연,대성중학교,3,13 반일집회 등...

반일의 방법으로 조기 공산주의자들의 근거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해란강은 간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상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있다. 간도는 고조선의 발상지였으며 청산리대첩과 봉오동전투 등 항일무장투쟁의 근거지이다.
 
용정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비암산 위에 정자와 기념비로 이루어진 일송정은 `선구자' 노래로 잘 알려져 있다. 현지인에 따르면 일송정에는 과거 정자 모양의 한 소나무가 서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소나무 밑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항일의 의지를 불태우곤 했다고 한다. 이를 우려한 일제가 소나무에 구멍을 뚫고 약품을 넣어 일송정을 고사시켰다고 전해진다.

최근 비암산은 공사중이라고 한다.그래서 이번에 들어가보질 못했다. 지난 2003년 3월 중국 지린(吉林)성 옌볜(延邊)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시 비암산에 일송정(소나무)가 복원되었다고 한다.알다시피 가곡 선구자에 나오는 소나무는 1938년 일제에 의해 고사된 뒤 복원된 것이다.그리고 용주사까지 복원되고 있다고 한다.

용정의 어원은 용드레마을이다.

모아산기슭의 해란강반에 자리잡은 용정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있는 아름답고 아담한 도시이다.무릇 룡정에 다녀온 사람들은 모두 시내 중심에 있는 룡정지명기원지에 와서 돌아보고 흔상하면서 한차례 관광을 한다.

이곳에는 우아하게 하늘높이 치솟은 수양버들 한그루가 서있다.바람에 나붓기는 휘늘어진 푸른 가지가 왕래하는 관광객들을 정겹게 부르고있다.수양버들옆에는 한장 남짓한 높이의 돌비석이 세워져있는데 비석의 정면에는 황금빛이 번쩍이는 <<룡정지명이 기원된 우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고 비석의 아래쪽에 있는 우물어귀를 돌로 둘러쌓았는데 이것이 바로 <<용정>>이라고 부르는 우물이다.

우물은 마치 하나의 거울처럼 흘러간 역사의 찬란한 빛발을 반사하고있다.때는 1879년전후,조선족농민 장인석과 박윤언 두 가정이 륙도구(지금의 용정)에 이사와 황무지를 일구고 곡식을 심다가 문득 이 오랜 우물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들은 사람들이 우물에서 물을 퍼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부근의 한족농민들과 함께 이곳에 두레박 받침대를 세웠는데 조선족들은 이를 용드레우물이라고 하였다.이로부터 륙도구를 용정촌이라 부르게 되였다.1934년에 지명기원우물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우물을 다시 수건하고 주위에 기둥을 세우고 우물둘레에 철관을 씌웠으며 돌비석을 세우고 소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었다.

친일청산을 위해서는 선구자 안부르기 운동을 해야한다고 한다.<음악가 김종화-그의 음악 작품과 인생>(민족출판사)이란 책이 있는데 그 위에는 안내문이 적혀 잇는 글에 눈이간다. "<선구자의 노래>의 진위를 아시려면 …. <음악가 김종화> 이 책을 보십시요"라고....

김종화(1912~ ) 선생이 지은 노래들을 수록한 책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몇 해 전 가곡 <선구자>가 <룡정의 노래>를 표절한 곡이며, 윤해영과 조두남의 친일행적을 밝힌 김종화 선생의 증언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우리도 관광객으로 갔으니 설명할 겨를도 없이 선구자를 부르게 되었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로 인해 1920년의 간도참변이 있었다.일본이 봉오동 전투에 대패한 뒤 자행한 보복 학살극인 그 참변에서 조선인 5만 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1946년 설립된 용정중학교는 현재 `룡정중학교력사전람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용정중학교는 문익환목사 이성국목사 등을 배출했고 문재린목사가 교사로 재직한 곳이다. 또한 윤동주시인의 시비가 서 있었으며 2층의 전람관도 윤동주 전람관이었다.
 
룡정중학교력사전람관은 1920년 이후 용정지역, 나아가 만주지역 민족교육의 현황을 이해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현지에 따르면 연변지역을 포함한 동북 3성의 조선족이 최근들어 줄었다고 한다. 백두산은 북한과 가장 가까운 곳인데도 조선족의 비율이 많이 줄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정부의 한족 이주정책과 조선족 후손들의 한민족으로써의 정체성 약화라고 한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하는 내용이다.정부 차원 보다 중국 정부를 자극하지 않는 민간단체 중심의 한민족 정체성과 조선족에 대한 한국어·역사 교육지원을 체계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됐다. 이를위해 한민족 네트워크가 정착돼 조선족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하며 인터넷을 통한 교류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됐다.


16:00
출압하지 못하여 도로에서 멀리 비암산 일송정을 바라본다.



16:16
윤동주 시비가 현존하는 과거 대성중학교 건물 앞에 놓여있다.




17:10
용문교와 용문교 너머 해란강이 흐르고 있고,그 너머 비암산에 일송정이 보인다.






서시(序詩)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정음사, 1948>


조국의 광복을 불과 6개월 남겨두고 감옥에서 사망한 지 60주년이 지난다.그가 만 27년 2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한 일본 규슈(九州)의 후쿠오카(福岡)형무소는 지금은 미결수를 가두는 구치소로
바뀌었다. 부지의 상당 부분은 공원과 시민회관으로 변모했다.

“고인이 강제로 맞았던 주사는 생체실험으로 악명 높은 관동군 산하 ‘731부대’가 실험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것입니다. 당시 규슈제국대 의학부 의사들이 연구에 가담해 여기 수감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도 생체실험 대상이 됐을 가능성이 큽니다.”몇 해 전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에
동참한 의사 다케다 마사카쓰(武田正勝·68) 씨의 말이 귀에 서늘하게 다가온다.

나는 윤동주기념관에서 "연변항일혁명사적지"라는 책을 한권 구입했다.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림50돐헌례도서로 되어있고 지은이는 박청산이고 출판사는 연변인민출판사이다.
칼라판 사진과 190페이지의 용정역사를 살펴보면서 고구려,발해를 이어 간도,연변,용정에 대한
시각을 더 넓히는 계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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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모든 것 속에서 자신을 만난다.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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