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선대)거등왕이 신선을 초대하여 바둑을 한판 둔 곳

- 언제 : 2006.9.24
- 날 씨 :맑음
- 몇명:홀로
-.어떻게:벌초 후 귀가길에
- 테마:문화유산답사

 

매년 가는 집안의 벌초행사이지만 산소들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있고 길마저 밀림 숲속이라서 한번 다녀오면 손과 발에 잡다한 생채기와 풀독들 때문에 고생이 많다.
그래도 추석이 가까이 오면 꼭 통과의례로 해야하는 일인데 올해는 다행히 날씨가 상대적으로 시원해서 좋았지만 여전히 손과 발에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이틀에 걸친 등산과 풀베기를 마치고 귀가길에 초선대를 찾는다. 초선대는 부산일보에 연재된 김인호의 "제4의제국" 중에 한번 언급이 된 기억 때문에 한번 찾아가보려고 마음 먹었던 곳이다.

초선대 마애불(招仙臺 磨崖佛)

분 류 : 도유형문화재 제78호
소재지 : 경상남도 김해시 안동 685-1

동 김해 IC에서 국도 14호선을 따라 안동공단 방향으로 5분여 거리에서 신어천을 만나고 신어천을 지나 오른쪽에 우회전하면 짙푸른 구릉의 푸른 숲이 있다. 김해시 안동 685-1번지가 주소인 초선대(招仙臺)로 경남도유형 문화재 제78호로 1974년 2월 16일 지정된 마애석불(磨崖石佛)을 만날 수 있다.

초현대(招賢臺)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동국여지승람]과 [김해읍지]에 의하면 김수로왕의 장남인 가락국 2대 거등왕(居登王)이 칠점산 (현재의 강서구 대저동)에 살고 있던 담시선인을 초청하여, 바둑과 가야금을 즐겼다는 전설이 구전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선인은 금(琴)을 안고 배를 타고 와서 거등왕과 바둑도 두고 노래하며 즐겁게 놀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곳에는 당시의 만남을 전하듯 선인과 바둑을 둘 때 거등왕(居登王)이 앉았다는 앙연대좌(仰連臺座)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으며 육계가 비교적 크며, 머리는 소발이고 이마는 백호가 있다. 대좌 왼쪽 부분이 일부 떨어져 나갔고, 마멸이 심하여 전체모습이 선명하지 않으나, 불상의 뒤쪽에는 둥근 모양으로 음각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이 있고 옷자락이 무릎까지 덮고 있다.

불상 연구가들이 고려시대의 불상으로 아미타여래로 보고 있으며 높이 5.1m 몸통 높이 4.3cm, 머리높이 1.1, 어깨폭 2.5cm, 대좌높이 0.8cm 대좌폭 4.7m로 김해지방에서 가장 큰 불상이자 대표로 꼽히고 있다.

이 불상에 대해 수로왕의 왕비인 허비를 수행해 와서 이 나라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허비의 형제 장유화성(허보옥)의 상이라고 보는 이가 있다. 이는 불상이 서쪽의 고국(인도 아유타국)을 향해 있다고 보는 이가 있기 때문이나 향인들의 구전일 뿐이다. 이곳 주위가 도시계획으로 개발이 되고 있어 초선대의 모습은 더욱 푸르고 아름답게 돋보이고 있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옛 김해 금릉팔경의 하나였던 초선대의 아름다운 전설과 문화재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당국과 시민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칠점산은 현재 김해공항 옆의 제5전비 공군부대 내에 있는데 과거에는 대동여지도에도
언급되는 큰산이었으나 지금은 모두 깍여나가고 35M정도의 반점만 남았다.초등학교 어린시절 칠점산을
부수는 남포소리들 들으며 하교하던 기억이 새롭다.

 

초등학교 교가에도 언급되었는데..."칠점산 아침안개 검붉은 빛에"라는 가사가 기억난다.
초선대에서 초대를 한 거등왕은 김수로왕 다음으로 왕이된 가락국의 제2대왕 이름이다.
 

 

 

 

 

 

 

 

 

 

 

 

 

 

 

 

거등왕이 초대한 담시선인은 누구인가?

 

[박혁거세와고공선인 -담시선인 - 물계자 선인(화랑도 제도 창시자) - 원광법사(세속오계) - 국선도-풍류도-도선국사의 관계]
신라(新羅)의 시조 밝은이 밝혁거세를 보좌했던 국선도인들 중 고공선인은 발해만에서 바가지를 타고 계림에 도착했는데 조선 중종 때 지은 해동의 선도역사를 기록한 청학집에 보면 고공은 박을 타고 바다에서 나타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마치 달마대사가 양자강을 갈대잎사귀 하나 타고 건넜다는 일위도강(一葦渡江)의 전설과 흡사하나 고공선인은 달마대사와 달리 강을 건너온 것이 아니라 바다를 바가지를 타고 온 것으로 국선도 도인들의 도력이 중국전설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공선인은 여러 가지 기행(奇行)과 이적(異蹟)을 잘했는데, 옥(玉)을 달여먹고, 나무껍질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후에 설악산으로 들어가서 종적을 감췄다. 고공선인의 도맥은 가야사람 담시선인에게 이어졌는데 담시선인은 칠점산에서 살았다. 옥처럼 맑은 얼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 나왔고. 목소리는 맑은 얼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나왔다. 목소리는 경읽는 소리처럼 낭랑했다고 한다.
한번은 가락국의 왕이었던 거등왕(居登王)이 담시선인을 초청하여 함께 놀았다. 이때 거등왕은 큰 소를 잡아 대접하려 했는데, 담시선인은 고기를 사양하고 도라지만 먹었다고 한다. 담시선인의 선맥(仙脈)은 물계자 선인에게 이어졌는데 물계자 선인이야말로 화랑도 제도를 탄생케 한 역사적 인물이다.

물계자 선인의 제자 중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만들어 신라의 인재들을 화랑제도로 양성하였다. 물계자 선인은 8백살을 살면서 신라 국선도의 산증인 노릇을 하였는데 그가 전라남도 영암의 월출산에서 도선옥룡자에게 국선도를 가르쳐 한국 풍수의 맥을 있게 한 것도 유명하다. 신라의 국선도는 밝달도의 이두표기인 풍월도 혹은 풍류도로 불리웠는데 모두 물계자 선인 때 정착된 이름이다.

풍류도가 진흥왕 때 국가적 지원으로 화랑도로 불리우게 된다. 고구려(高句麗)는 소수림왕 372년에 불교가 들어와 승인 되었고, 백제(百濟)는 침류왕 때인 384년에 불교(佛敎)를 수용(受用)했던 것과는 달리 초기 중국과 외교적 관계도 없었고 독자적인 선도 조직이 사회에 퍼져있던 관계로 150년 뒤인 화랑인 이차돈의 순교로 527년이 되어서 비로소 불교(佛敎)를 공인(公認)하게 된다.

풍월도 화랑도로 국선도를 귀족과 왕실(王室)의 가족들을 교육하여 나라의 인재로 등용하였는데 왕의 권력 행사가 번번이 화랑(花郞) 출신들의 화백회의에서 거부되기가 일 수여서 신라왕은 중앙집권적 절대적 왕권 구축이 어려웠다. 그래서 왕실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이차돈이라는 왕실의 화랑출신을 불교로 전향시켜 순교(殉敎)로 희생시킴과 동시에 이 사건의 근원을 화랑으로 누명(陋名) 씌워 권력주변의 모든 국선도인들을 숙청(肅淸)함으로서 비로소 불교가 국선도 역할을 대신하기에 이른다. 이때가 법흥왕 14년 527년 신라(新羅)에서도 민족정기(民族正氣)가 사라지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밝달법의 이두화(吏讀化) 표기인 풍류도, 풍월도로 통용되던 국선도가 이차돈의 순교로 사라진 후 신라는 급속히 국력이 약화되어 갔는데 이를 다시 세우고자 진흥왕이 즉위하여 인재의 필요성에 따라 다시 화랑제도를 부활시켰다. 이 화랑제도는 왕실의 보위와 국가 보국(報國) 차원에서 불교와 융합시켰다.
즉 수련은 국선도로 사상은 불교로 변질시켰고 화랑의 지위도 많이 격하되어 국가의 주요사안에 대한 화백회의도 사라지고 왕이 마음대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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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낭만을 찾아가는 山中問答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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