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산▲정상의 천지天池는 수로왕릉을 위한 비보裨補 연못이다.

- 언제 : 2008.5.1 (목) 09:30~17:00
- 얼마나: 2008.5.1 10:10~12:40(2시간30분)
- 날 씨 : 덥지만 맑은 날씨
- 몇명: 홀로
- 어떻게 : 자가용 이용
▷ 백운암-갈림길-천지-무척산 기도원-무척산 정상-백운암(원점회귀)-마현산성-구지봉-수로왕릉
- 개인산행횟수ː 2008-17[W산행기록-196 P산행기록-336/T686]
- 테마: 문화유산답사산행
- 산높이:무척산
703m
- 호감도ː★★★★

 


오늘은 노동절 [, Labor Day]이다.한때는 "노동"이라는 말이 "인민"이라는 말 만큼이나 터부시되어 온 단어라 노동 대신 근로라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는데,운동권에서 보았을 때 지난날 3월 10일 "근로자의 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적도 있었다.

 

그동안 노동자에 대한 권익이 많이 향상된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못한 부분도 많다.특히 비정규직 문제가 최근의 문제다.



5월1일 노동절을 메이데이(May Day)라고 한다.그리고 조난신호를 보낼때 프랑스어 'm'aider(메데, 날 도와줘)'에서 온 말로 음성으로는 '메이데이'이며 이에 해당하는 모르스 부호로는 'SOS'인데 노동절의 메이데이는 공교롭게도 조난신호의 메이데이와 발음이 같은데 작금의 메이데이(노동절)은 메이데이 메이데이 메이데이(조난신호)를 외쳐야 할 시절이다.



오늘 우리집에서 메이데이로 쉬는 사람은 나 혼자다.학생은 등교해야하고 작은 가게를 하더라도 사업주는 일을 하러간다.

 

사실 나 같은 증권회사 직원은 오늘 같은 날 쉬어도 되는지 약간 의심스럽고,우리나라 사회에서 교사와 공무원은 노동조합을 만들었지만 오늘 쉬지 않는 것을 보면 노동자는 아닌 것같다.정작 오늘 같은날이라도 쉬어야 할 사람들은 비정규직인 것 같은데 그분들은 대부분 일을 하는 날이다.

 

그분들을 생각하면 뭔가 죄스럽다.아침 일찍 눈을 떠서 새벽 댓바람에 등교하는 아들을 먼저 학교까지 차에 태워주고,다음 다소 가까운 딸까지 학교까지 태워준 다음,홀로 문화유산답사를 겸한 세미 산행을 떠난다.

 

오늘은 무척산無隻山의 천지를 보기로 하였다.그 동안 무척산은 여러번 갔지만 정상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천지는 보지 않고 지나쳤었다.대승불교의 선구자인 인도의 무착(無着)스님의 이름을 따서 무착산, 무축산, 무척산으로 이름지어진 산인데 이름 그대로 한다면 "짝이 될 만한 산이 없을 정도로 빼어나다"는 의미다.실상 주변의 산들과 연계되지 않고, 독립된 것이 특징이다.

 

정상 부근에 천지(天池)라는 전설어린 호수가 있는데, 수로왕릉의 물줄기를 잡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수로왕이 돌아가자 지금 김해시 서상동의 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위치에 묘를 만들기 위하여 땅을 파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곳에서 물이 솟아나게 되어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그때 갑자기 늙은 도사가 나타나서 무척산 꼭대기에 연못을 파면 수로왕릉의 물줄기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이를 일러준 것은 도사가 아니라 인도에서부터 허왕후를 수행하여 따라왔던 신보(申輔)였다고 한다.신하와 백성들이 이 말을 따라 연못을 파니 물이 더 이상 솟아나지 않아 무사히 장례를 마치게 되었다고 한다.이때 판 연못이 지금의 무척산 천지라고 하는데 실제 천지를 둘러보니 백두산의 천지나 한라산의 백록담과 같이 화산폭발에 의한 자연의 못은 아니었다.산 정상 가까이에 있는 저수지 같은 느낌으로 인공의 흔적이 보였다.

 

어쨌던 이 설화 역시 수로왕의 신성함을 보여주는 이야기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는 모은암(母恩庵)이 있고, 가락국의 불교중흥을 위해 창건했다는 백운암이 유명하다.이 산의 낙동강 건너편 만어산에는 또 만어사(萬魚寺)가 있기도 하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모은암과 삼랑진의 부은암(夫恩庵)과 진영읍의 자암(子庵)이 가락국의 세 원찰(願刹)이었다고 한다.결국 이번산행은 가락국의 후예로 나의 뿌리를 알아보는 걸음이기도 하다.

 

 

 

 

10:10~10:46
백운암 주차장에 차를 대고 콘크리트 도로를 따르다 바로 오솔길로 접어들어 백운암으로 1KM정도
걸어 올라간다.산사 스피커에서 관세음 보살이 반복되는 관음정근 염불소리가 들려온다.

 


사찰입구는 초파일이 가까워져 연등이 걸려있고,1800여년의 고찰을 증명하듯 아름드리 나무가
눈에 띈다.초라한 일주문 앞에서 스님께 간단히 예경하고 오르니 그 유명한 석간수가 보인다.

 

1KM 정도 올랐을 뿐인데 벌써 몸은 땀으로 젖었다.이제 겨우 5월 1일이지만 5월5일 어린이날이
바로 입하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여름이 성큼 다가온 것이다.신록을 보니 이미 무(茂)의 단계이니
하늘 기운은 벌써 무戊이다.이런 기세라면 올해는 6월만되어도 푹푹 찌는 기(己)의 단계로 갈 것 같다.

 

주련을 보니 이름난 기도도량답게 도(道)를 설파하는 듯하다.도道는 무엇인가?

 


만념萬念(여러가지 생각)을 일념一念(한가지 생각)으로 귀착시키고, 그일념을 무념無念으로 만든 것
아닌가? 그것이 곧 명상이며 기도일 터....

 

백운암은 가락국 시대에 무척대사라는 스님이 이곳에 머물러 창건했다는 설과 허황후의 오빠이자 불교
를 최초로 유입시켰다고 전하는 장유화상이 김수로왕 당시(309년) 가락국의 부흥을 위해 세웠다는 설이
전해져 오고 있어 우리나라 남방불교의 유입의 사례로 짐작된다.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의 전래시기는
모두 나라에서 공식화한 것이고 여러자료를 보면 그 이전에 이미 민간에 퍼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조선시대에 와서 1801년(순조1) 지방의 유지인 김두영金斗榮과 송유철宋有轍의 도움으로 중수
하였다고 하며 1890년(고종 27) 덕송德松스님이 칠성각 등을 중건했다고 한다.현재의 가람은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백운암은 부산 금정산의 말사로 영험있는 기도도량이며 법당 뒤편 큰 바위틈에서 흘러내리는 석간수는
문둥병이 걸린이가 마시고 나았다는 설화가 전해져 올 정도로 유명하다.백운암은 대부분의 가야불교
유적처럼 그 역사성이나 유명세에 비하여 초라하여 안타깝기까지하다.허름한 법당과 칠성각 그리고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요사채 두채가 협소하게 자리잡고 있지만 여기서 보는 경치는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백운암 뒷편 오행바위가 예사롭지 않은데 아마도 이 때문에 기도빨을 받는 모양이다.
정작 이 절이 그래도 이름깨나 있는 것은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도 콘크리트 도로가 나 있다는 점이다.

 

 

 


 

11:18~11:25
백운암을 뒤로하고 제법 가파른 산길을 오르니 멀리 낙동강이 조망되는가 싶더니 곧 정상과 천지 못으로
나뉘는 갈림길이 나타난다.나는 천지 못으로 향하며 아래로 걸음을 옮기니 곧 아름다운 분홍빛 겹벚꽃 너머로
기도원이 나타난다.천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한바퀴 도는데 돌벽이 아담한 교회가 나온다.

 


교회엔 소풍나온 학생들이 소나무에 걸린 그네를 타며 즐거워하고 있다.


 

천지는 신록과 분홍빛 꽃나무의 반영을 보여주는데 강한 5월의 햇살에 기름띠는 분명 아닌데
물빛에 무지개까지 보여준다.



158세까지 살았다는 김수로왕의 릉을 위해서 산 정상에 연못을 팠다는 전설...
김수로왕은 탄신이 아니라 탄강誕降했다고 하니 하늘이 왕을 보냈다는 의미다.
하늘에서 왔기 때문에 하늘 가까이 산이 아니라 평지에 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보(裨補)로서 천지를 조성 한 것으로 보인다.비보裨補풍수는 모자라는 곳을 도와서 채워준다는 의미다.
최근에 불이 난 숭례문(崇禮門) 앞에도 비보 용도로 파 놓았던 연못이 있었다.바로 남지(南池)이다.

 


숭례문에서 서울역 쪽 방향에 판 연못이었다. 지금은 이 연못 터가 메워지고 그 자리에는 '이 연못을 장원서(掌苑署)
라는 부서에서 관리하였다'는 내용의 표석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이 남지는 숭례문 밖의 화체산(火體山)에 해당하는
관악산(冠岳山)의 화기(火氣)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용도로 파 놓았던 것이다.



좌청룡 우백호나, 터를 감아 도는 냇물과 들판이 좋고, 집 뒤의 배산(背山)이 좋다면 앞에 화체산이 있더라도 위험을
감수하고 주택 터를 잡는 경우가 있다 구례의 '운조루(雲鳥樓)' 터가 바로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앞산이 약간 화기가
있는 바위산이다. 그래서 운조루에는 대문 앞에 네모진 형태의 연못이 있다. 축대를 쌓아서 인공적으로 조성한 '비보연못'
인 것이다. 또 하나 화재 예방 장치는 운조루 대문 앞을 흘러서 나가는 조그만 자연 수로(水路)이다.
이를 내당수(內堂水)라고 부른다. 물론 집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이 연못과 수로의 물을 직접 퍼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어쨌던 여기서 놀라운 것은 풍수의 개념이 별로 없었던 1800년전에 이렇게 비보로 연못을 팠다는 것이다.
그것도 산정상에 연못을 내었다는 놀라운 발상이 아닌가?


 

 

11:59~12:37
1.7KM 아래로 내려가면 모은암이 나오는데 자주 가본 터라 위로 1.2KM 위로 걸으면 나타나는 정상으로 향한다.
정상 가까이에서 내려다본 생림면 봉림마을과 마현마을이 눈에 들어오고 곧 정상이다.


정상에서 낙동강변쪽을 바라보니 용 한 마리가 낙동강물을 마시는 모습이 나오는데 저곳이 바로
용산龍山이다.긴 용의 허리 아래로 신대구고속국도가 관통하고 있어 끔찍스러운 모습이다.
그 고통이 용산의 꼬리 쯤에 있는 용산초교까지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용산 머리부분엔 그 옛날 낙동강을 건넜던 용당나루가 있었다.용당龍堂은 당연 낙동강물에
빠져죽지 말라고 용신제를 지내던 당집神堂이 있었다는 의미일것이다.

 

다시 백운암으로 원점회귀하여 차를 몰아 마현산성으로 향했다.

 


마현산성은 김해관광안내도에도 나와있는데 실제 주변에 가니 기독교 공원묘지만 있고
별다른 안내판도 없고 그 주변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도 알지 못했다.

 

마현산성은 생림면 봉림 산 102번지에 있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별로 찾지 않는 모양이었다.



"가락국 수로왕때 축조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해발 약 215m 정도의 뾰족하고 경사가
심한 독립된 산봉우리 정상부 주위에 축조되어 있다. 산성의 동쪽과 북쪽 일부는 천연의 석벽을
그대로 이용하였고 석축은 서쪽과 남쪽에만 설치되어 있다. 성벽의 장축은 지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설치되었으며 서쪽 중앙부가 약간 안으로 밀려들어와 전체가 누에고치 모양을 이루고있는
전형적인 한국식 산성이다."

 

라고 안내되어 있어서 답사를 한번 해보고 싶은 곳이지만 날씨도 덥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그대로 차를 돌려 구지봉으로 향했다.


김해시내로 들어와 구지봉 입구엔 우리나라 옛노래 3편 중 하나인 구지가가 영대왕가비라는 이름으로
노래비가 있고 조금 오르니 곧 구지봉이 나오는데 한편에 고인돌이 있다.고인돌 위에는 한석봉이 적었다는
한문으로 구지봉석龜旨峰石이 음각되어 있다.

 


산세를 보면 구지봉이 거북이의 머리라면 몸 부분이 허황후릉과 연결되고 이후 천문대가 있는 분산성으로
연결된다.거북이의 목에 해당되는 곳은 현재 구지터널이 있는데 이길은 김해와 진영을 잇는 길로
일제시대때 정기를 끊는다고 이곳에 도로를 놓았는데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하여 최근에 도로위에 흙을 놓은
인도를 놓아 끊어진 목 부분을 연결하였다.

 

가락국기에 따르면 여섯 개의 항금알이 변해서 어린아이가 되었고,이들이 자라 왕위에 올랐는데
가장 먼저 머리가 나왔다는 수로왕이 세운 나라는 가야국(김해)으로 본가야이고,나머지 다섯은 각각
대가야(고령),아라가야(함안),고령가야(함창),성산가야(성주),소가야(고성)인데 이들 나라는 모두
낙동강변 주변을 따라 세워졌다.

 

허황옥 황후는 김해허씨의 시조이며 16살에 시집와서 157세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허황후릉 앞에는 그 유명한 한국에서는 없다고 하는 파사석으로된 탑이 있다.
허황후의 출신지역은 아직도 시원하게 풀지 못한 수수께끼인데 김해 허씨라는 사성을 볼때
북방세력인 김수로왕과 남방세력인 허황옥 세력의 공동정권이었던 것 같다.

 

한국 최초의 국제결혼,황후가 원해서 김해허씨라는 사성을 받은 점 등을 고려해보면
1900년전의 사실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현재 모친의 성씨를 따르는 것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강하다.

 

 

참배를 마치고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가야의 철기와 토기를 비롯한 무덤에서 나온 부장품들을 관람하고
바로 수로왕릉으로 향했다.

 

 

수로왕릉 안으로 들어가니 홍살문 뒤로 가락루가 보이고 납릉정문 이후 수로왕릉이 보인다.
수로왕릉을 납릉納陵이라고 하는데 납릉정문 좌우로 쌍어문과 파사석탑,활,연꽃봉오리등이 보인다.
릉 뒤쪽은 천년을 넘은듯한 고목들이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인데 "하늘"은 어디일까? 대성동고분 박물관에 있는 오르도스형 동복(청동 솥)을 보면
아마도 북방계 기마민족으로 실제 철갑을 두른 말과 전사의 모습이 진열되어 있는데 아마도
"하늘은 북방"인 모양이다.그래서 김수로 집단이 흉노 태자 김일제의 후예라는 설이 등장한다.

 


흉노라는 이름은 중국의 한족漢族이 지은 이름인데 한족은 세상의 중심을 자신들이라고 보고 사방의
다른 민족은 모두 오랑캐로 본 특이한 세계관을 가진 정신이상족속들(?)이 아닌가?

 

서양학자들은 흉노가 로마제국에 들어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훈족으로 보고 있다.

 


한때 중국의 한나라는 흉노에게 대패하여 해마다 비단과 식량을 공물로 바치는 제후국이었다.
한나라 원제는 흉노 황제에게 자신의 후궁 왕소군을 공주라고 속여 시집을 보냈는데
왕소군은 양귀비,서시,초선과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손 꼽는다.

 

이후 한나라 7대 황제때 상황이 역전되어 흉노 태자 김일제가 포로로 잡혀가는데 김일제의 이름이
문무대왕비문에 나타난다.문무왕이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것,그러니 경주 김씨는 김일제의 후예이고
김해김씨는 김일제의 아우 김윤의 후예라는 설이 있다.



김일제와 김윤의 외가인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면서 번성하다가 왕망이 실각 한후 유랑길에 오르는데
김수로왕 일가가 김해 구지봉에 나타난 시기는 서기 42년은 신나라가 멸망 한 후 18년 만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 변진 조에 보면 "그들(가야인)은 외지外地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분명하다"라고 씌여있다.

 

 

초등학교 애들 소풍가는 정도의 수로왕릉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데 부산과 김해 창원을 비롯한 낙동강변
무덤이나 주거지에서 출토되는 문화재를 보면 알면 알수록 그 규모나 선진화된 제도나 생각들,그리고
우수한 불교문화와 철기류등은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로 보아야한다.10대 520년인데 아마도
2~3대의 역사가 빠져있는 것으로 본다는 학설이 있다.그대로 계산하면 1대의 재위기간이 평균 52년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전불시대前佛時代 대부분은 가야불교로 보아야 할 정도다.

 

 

가야고분총 (伽倻古墳塚)

강 남 주


잠들었던 한 시대(時代)가
눈을 비빈다.
일어선다.

상여에 실려 온 잠이다.
숲을 이루어 온 잠이다.
말발굽 소리가 멎은 채
2천년을 흘러 온 잠이다.

대한(大旱)에는 석화(石花),
홍수(洪水)에는 조개로 숨쉬며 잤다.

호리꾼 쇠꼬챙이 끝에도
안택(安宅)은 구중궁궐
빗장을 걸어 놓고
속에다 설화(說話)를, 전설(傳說)도 쌓아 올렸다.

다시
나의 관절(關節)은 나의 패옥(佩玉)
패연(沛然)히 쏟아지는 고요 속에
신발을 벗어두고
편히 쉬는 잠.

어느 날인가.
이 오랜 편안을 뒤흔들고
빗장을 여는 놈은 누군가.


고속도로(高速道路)로 달려 와
말발굽 소리를 앗아가고
발목과 무릎과
이마에 하얗게 쌓인
나의 분노를 발굴(發掘)하는 놈은 누구인가.


잠들었던 가야시대(伽倻時代)가
눈을 부릅뜨고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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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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