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1 )모든것을"받아"들이는 바다를 닮은 산속에얽힌피맺힌사연들

 

-.일시 : 2008.11.22 16:00~11.23 18:00
-.날 씨 :맑음
-.몇명: 12명
-.어떻게:자가용 이용

▷하동-야베스산장-석주관칠의사묘사적지-안한수내마을(송정)-연곡사-매천사-백장암-용담사지-만복사지
- 호감도ː★★★★★

 

 

 

 

노자의 도덕경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나온다.해석을 해 보면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는 애기다.물의 상징성은 겸손이다.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자신을 낮추는 게 물이다. 자신을 낮추기 때문에 항상 아래로 흐르며 남들이 비루하다고 싫어하는 시궁창까지 자신을 흘려 보낸다.


물의 상징성은 다투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투지 않는다.즉 부쟁(不爭)의 이미지는 물이 지닌 가장 큰 위대함 중 하나다.자신을 낮추기가 싫어 위로 올라가려고 다투려는 물을 본 적이 있는가.물이 흐르다가 돌을 맞닥뜨리면 또 어떤가. 돌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용을 쓰지 않고 그냥 슬쩍 비켜 갈 뿐이다. 물은 그렇게 평화적이다.



그렇지만 결국 물은 모든 것을 이긴다. 그리고 만물을 모두 이롭게 하는 것도 바로 물이다(水善利萬物).물처럼 다양한 형태도 드물다. 하늘 꼭대기로 향하는 수증기에서부터
떨어지는 빗물 그리고 소복소복 내리는 눈까지,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다 수소원자 2개에 산소 원자 1개가 뭉친 똑같은 물이다. 어디 그 뿐이랴. 동네 실개천에서부터 강물 그리고 바다까지. 물은 없지 않는 곳이 없다는 '무소부재(無所不在)'의 신의 권능까지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무엇일까?


아마 바다가 아닐까 싶다. 최고의 선인 물 가운데 또 다시 최고로 뽑힌 바다의 위대함은 어디에 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이것은 바다의 어원을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바다는 모든 것을 다 "받아"주기 때문에 '바다'로 불리고 있다.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다가 되기 위해서는 물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산 중에서 바다를 닮은 최고의 산은 어디일까? 아마도 지리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둘레 300리, 삼도에 걸쳐져 있는 산,1,400M급 봉우리가 20여개를 거느린 이산은 근현대의 한반도의 모든 비극적 요소는 모두 품고 있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박2일 코스로 일찌감치 송년회 겸 산행을 한다는 모임에 실로 오랜만에 얼굴이나 한번 뵈야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지리산 연곡사 인근에 위치한 야베스산장으로 향한다.전날은 책을 읽느라 날밤을
세우고 새벽엔 진하 명선도 일출을 찍으로 갔다와서 휴식을 취했지만 몸은 다소 고단한 편이다.나름대로 허드렛일을 좀하고 난후 오후 4시에 다시 차를 몰고 나섰는데 하동에 도착하니 날이 저문다.

 

 

 

 


 

 

 

산장에 도착하여 닭고기 바비큐와 막걸리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니 1시간 정도 흘러 전원 12명이 모두
모였다.장소를 실내로 옮겨 회,망개떡,백숙 등 안주도 다양하고 막거리,소주,맥주,와인,40도 양주,
증류한 도수 80도의 술까지 술 또한 다양하다.

비지정탐방로를 탐하는 "악의 소굴"로 들어왔는가 했더니 술 좋아하는 양산박의 소굴로 들어 온 느낌
이랄까?.이미 나는 기세에 눌려 와인만 홀짝이는데 산중호걸들은 80도 술을 물 마시듯 시원하게
마신다.

 

옛적 산의 주인은 산적이라면,요즘 산의 주인은 관리공단이다.조금 심하게 말하면 산에 금 그어놓고
통행세 걷는거나,벌금 물리는거나 방식만 다를 뿐 매한가지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악법도 법인데 법을 우롱하며 "작전과 침투"를 즐기는 모습이 영락없이 옛적 산의 원래 주인
들이 돌아온 것 같다.

 

 

12시가 되어 코골이 소리가 들리면 깊은 잠을 들지 못하는 나는 처음부터 내가 가져온 오리털 침낭에
몸을 맡기며 온기가 전혀 없는 조용한 냉방으로 피신하여 하룻밤 편안하게 숙면을 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원래 뜨끈뜨근했던 방은 새벽 1시 이후 보일러 이상으로 내가 잔 방과 똑같이 냉방이
되었고,호기롭게 마셨던 몇분은 후유증으로 밤새 고생을 한 모양이다.여하튼 아침은 밝았고,아침식사를
마친 후 밤을 함께 보낸 일행들은 산으로 향하고 나는 원래의 계획대로 문화유산 답사에 나서며 헤어졌다.

 

 

 

 

 

 

 

 

오늘의 문화유산 답사는 오전엔 지리산에서 왜적과 싸운 흔적을 따라가는 것과 오후엔 지리산 인근 폐사지를 둘러 볼 예정이다.가장 먼저 찾은 곳은 석주관 칠의사묘 사적지이다.

 

 

 

 

석주관 칠의사묘 사적지

 

 

사적 106호인 칠의사는 정유재란때 구례지방으로 침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석주관성에서 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순절한 구례현감 이원춘을 비롯 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등의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가꾸어진 묘를 비롯한 유적으로 사적 106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은 호남지방을 목표로 하여 이곳을 집중공격 하였다. 그러자
왕득인이 의병을 일으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그후 왕득인의 아들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의병·승병들이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의병을 희생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순조 4년(1804) 나라에서 왕득인을 포함한 7명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이 내려졌고,
1946년에는 뜻있는 지방 유지들에 의해 칠의각과 영모정이 세워졌다.



현재 석주관 칠의사단에는 높이 77㎝, 폭 29.5㎝, 두께 12㎝의 똑같은 규모의 칠의사 단비(壇摳)가
세워져 있는데 왼쪽으로부터 이원춘, 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의 순서로
모셔져 있다.



한편 석주관 칠의사 유적의 입구 우측에는 새로이 칠의사의 정신을 기리고자 기념관을 건립하였는데
사당으로 보이는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와가로 되어있고 내삼문 밖에는 동·서재(東·西濟)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인데 동재는 팔작지붕이고 서재는 맞배지붕이며 그외 외삼문 등이
갖추어져 있다.



칠의사단 약 70M 아래 사당과 맞보는 위치에 8분의 묘지가 있으며, 그사이로 왕시루봉에서 시작된
계곡이 흐른다.

 

 

 

"일장공성만골고(一將功成萬骨枯)…", 한 장군의 승전 공로는 일만 병사들의 해골로 이루어진다는
옛 문자를 떠올리게 한다.

 

 
 
 

 

 

석주관성

 

계곡 좌우로 칠의사묘 사적지 위로 성이 보인다.사적 385호인 석주관은 전라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호남권 진입의 요새이며, 호남지역에 현존하는 유일한 관문이다.
 (호,영남 4대관문 : 안음의 황석산성·진안 웅치·운봉 팔량치, 석주관)

구례읍에서 섬진강을 따라 하동쪽으로 10㎞쯤 가다보면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는데 좌측으로
높이 약 10m의 낭떠러지가 나오는데 여기가 석주관이다.이곳은 삼한시대에 마한과 진한의 경계였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군사상 요충지였으며 고려때에는 남해에서 칩입한 왜구를 막기 위해 성을 쌓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을 튼튼히 하기만 하면 진주에서 구례, 남원을 향해 넘어오는
왜적을 방어할 수 있는 호남의 전략적 요충지로 고려말 이곳에 진(鎭)을 두고 둘레 500칸의 석성을 쌓아 왜구를 막았다.

조선이 개국하고 정국이 안정되어 감에 따라 진을 폐지하여 황폐되었는데 지금 남은 석축관문은 1592년
(조선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당시 전라 방어사 곽영(郭嶸)이 고려시대의 진성(鎭城) 위에 쌓은 것이며, 경사진 산허리의 정상부를 따라 축조된 현존 성곽의 길이는 736m, 석축 높이는
50~120cm이며, 석축에 일정한 간격으로 단(段)을 두고 단과 단 사이에 타구(垛口)를 두어,
적의 공격시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한 점이 특징이다.

이때의 축성작업은 정식 축성이었다가 보다 전란을 맞아 급하게 축조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이는 현재 남아있는 성곽의 잔존부를 통해 쉽게 알 수 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이곳 석주관에 고려말 때처럼 만호진을 설치하여 왜구에 대비하여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지만 활용되지 못하고 황폐화되어 현재에 이른다. 대부분은 무너져 훼손된 상태로 근래에 들어
다시금 복원을 하였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안한수내마을

 

 

칠의사묘를 참배하고 나와 바로 차를 몰아 인근 송정마을로 들어간다.
 섬진강과 지리산 사이 19번 국도변에 자리한 ‘송정리’는 4개의 작은 마을로 나뉘는데, 각각 한수내(川)
안쪽에 위치했다 해서 안한수내(내한), 바깥쪽에 있다 하여 바깥한수내, 새로 생긴 동네이므로 신촌,
사적 제106호로 지정된 ‘석주관 칠의사묘’ 옆 원송마을이 되겠다. 원래는 4개 마을을 합쳐 내한이라
부르던 것을 한수내 근처에 쉬어가기 좋은 큰 나무 정자가 있어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송정리로
개칭했다.

 

 

큰길에서 산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는 터라 일제시대 전까지만 해도 내한의 존재조차 모르는 이가
많아 의병장 고광순이 은거하며 의병활동을 했던 곳이다.담양 창평 출신의 고광순은 임진왜란 때
활동했던 고경명의 후손으로 산능선 너머 연곡사에서 순절했다.이곳엔 고광순의 손자인 고영만옹이 살아있는데 7순을 넘긴 연세라 한다.



마을을 빙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구례장날이라고 멋진 중절모를 쓰고 길을 따라내려가는 노인을 차에
태워 버스정류장까지 모셔주고 연곡사로 향한다.

 

 

 

 

 

 

 

 

연곡사로 향하던 중 야베스산장의 주인이 버스를 타고 내려와 주유소에서 기름을 사서 다시
돌아갈 버스를 기다리는 모습을 발견하고,픽업하여 야베스산장까지 다시 갔다 온 후 연곡사에 도착했다.
연곡사는 담장을 새로 꾸미는 등 단장을 하고 있었다.
 

 

 

 

곧장 연곡사 동부도로 향한다.참으로 걸작이다.연곡사는 고려 전기까지 스님들이 선(禪)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는데, 이 때문인지 이곳에는 이 부도 외에도 서부도(보물 제154호), 북부도(국보 제54호) 등
2기가 더 있다.



동부도(국보제53호)는 그 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받침돌,
가운데 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아래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모양을 각각 조각
해 놓았다.

 

 


가운데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중상(八部衆像)을
새겼다.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모양을 세밀하게 묘사해 두었는데,
이 부분에 둥근 테를 두르고 그 안에 불교의 낙원에 사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새겨둔 점이
독특하다.가릉빈가는 몸은 사람의 모습이고 새처럼 날개가 있다.


탑신(塔身)은 몸돌의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4천왕상
(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해 두었는데, 그 수법이 그리 훌륭하지는 못하다.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의
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끝맺음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표현할 정도로 수법이 정교하다.머리장식으로
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도선국사의 부도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가 없으며, 일제 때 동경대학으로 반출될 뻔한
위기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기단이 좀 높아 보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북부도는 동부도와 모양이 흡사하지만 북부도는 좀 투박하고 둔한 느낌이다.그 이유는 동부도를

보면 탑 옆면에 조형감을 높이기 위하여 구멍이 뚫려있는데 비하여 북부도는 그냥 붙어있는 모습이다.


 

 

 

 

 

 

동부도 앞에 동부도비(碑)가 있다.비몸돌이 없어진 채 귀부와 이수만이 남아 있다.귀부는 네 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고 엎드린 용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사실성이 떨어지며, 잘려진 것을 복구해 놓아
부자연스럽다.용의 등에는 새 날개 모양의 무늬를 조각해 놓아 새로운 느낌이다. 등 중앙에 비를
끼우도록 마련된 비좌(碑座)에는 구름무늬와 연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귀부와 이수 사이에 쇳조각
으로 받침을 해 놓았는데 녹이 슬어 흘러내리며 귀부부분은 쇳물로 색깔이 변했다.

 

 

 

 

동부도를 관람하고 북부도로 향하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연곡사 도량으로 햇살이 들어온다.
 

 

 

 

 

 

 

 

북부도는 동부도와 흡사한 모양으로 동부도보다는 조금 세련미가 떨어진다.국보 제54호이다.

 

 

 

 

연곡사 서부도는 동부도와 북부도에 비하여 격이 떨어지는 것을 한눈에 알 수있다.그래서 동부도와
북부도는 국보이며 서부도는 보물 제154호이다.서부도 이외 작은 부도들이 몇 개 더 놓여있다.

 

 

 

 

서부도 바로 아래 동백나무 숲속에 고광순 순절비가 있다.고광순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임진왜란당시
의병장 고경명의 둘째아들 고 인후의 12대 종손이다.본관 장흥. 자 서백(瑞伯). 호 녹천(鹿泉). 초명
광욱(光旭). 전라남도 담양에서 출생하였다. 1895년 일본이 대궐을 침범하고 국모(國母)를 시해하자,
통분을 참을 수 없어 기우만(奇宇萬)과 도모하여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일본 침략에 항거하였다.

 

그후, 동복(同福)에서 왜적을 대파한 후 구례 연곡사(燕谷寺)를 본영으로 삼고 고제량(高濟亮)·고광수
(高光秀)·박찬덕(朴贊德)·고광훈(高光薰) 등과 함께 여러 곳에서 싸우다가 왜적의 야습으로 연곡사에서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일어난 호남의 중기의병은 1906년 태인 무성서원에서 궐기한 거유
최익현의 거병을 필두로 시작됐다.1907년 장성의 기 후만 남원의 양 한규 광양의 백 낙구 창평의
고 광순등이 다시금 의병을 일으켰으나 모두 좌절돼었고 고 광순 의병만이 마지막까지 버티었다.
그는 이곳에서 축예지계(畜銳之計) 장기항전을 대비했던 것이었다.

 

 

고 광순은 지리산 포수들을 모아 강력한 빨치산의병을 만들어 일제군경과 여기서 맞설 생각이었다.
1907년 9월 11일새벽 광주에 주둔한 일본군 키로 중대와 진해에 도코로 중대는 연합 전선을 펴서
연곡사를 습격한다.창평고씨 명문 양반가의 종손이었던 고 광순은 당시 60 노후의 할아버지였다.
일본군은 창평고씨 고 광순의 집을 불태웠다.고 광순의 집이 불타던날 그의 벙어리 아들이 왜군에
항거하자 왜병은 창과 칼로 마구찔러댔다.벙어리 아들 재화는 하체가 피투성이됀채 껑충껑충 뛰면서
울부짖었다.그 하늘의 사무친 울부짖음을 고 광순은 피아골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전남 구례에서 활동한 의병장 고광순이 “불원복(不遠復·국권 회복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이라고 쓰고 일본군과 싸울 때 사용했다고 한다.

 

 

 

고 광순의 죽음에는 슬픈 사연이 많다.

 

 

의병을 일으키기전에 당대의 명문장가였던 황매천에게 격문(檄文) 하나를 써 달라 청했다.
그러나 황현 선생은 " 격문이 있고없고가 상관할바가 아니다 다만 노력해야 할 문제다"
라고 말하면서 격문을 써주지 않았다 한다.

 

 

한말의 생생한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의 저자 황현과의 일화가 그중 하나다.고 광순의 약전을 적은
저자 이기도 하다.1902년 그는 구안실에서 이곳으로 이주했다.매천 야록에보면 일본인들의 소행에 대한
매천의 분노는 그가 끈임없이 쓰는 왜놈이라는 표현으로도 입증된다.매천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음독으로
자결하면서 절세의 절명시를 남겼다.고 광순을 따른것이다.
 황매천의 절명시를보면...

 

秋燈菴倦懷千古(추등암권회천고) 가을 등잔밑에 책을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하니
難作人問識者人(난작인간식자인)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고 광순 보다는 7세나 위인 황현 황매천은 광양에서 태어났으나 구례에서 오래살았으므로
보통 구례사람으로 일컬어진다.고 광순의 죽음이후 그는 고 광순의 일대기를 적은 고 광순 약전을
편찬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재 끼가있어서 시문에 능하였고 상경하여 과거에응시하여 장원급에 우수한 성적을
내었으나 시골사람이란 이유로 격하시키자 벼슬을 단념하고 구례간전면 만수동 백운산밑에
구안실(苟安室 구차하게 편안함을 추구한다라는뜻)이라는 재실을 짓고 백운서실과 일닉정을
중축 학생들을 가르치며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우리 역사의 가장 중요한 저술중에 하나가 이루어진 그곳은 현재 황량하게 방치돼어있다.
지금도 그곳에 가보면 옹달샘과 매화나무가 매천 이라는 이름이 그곳에서 나왔음을 알게 한다.
바로 이곳 구안실에서 매천 야록이라는 중요한 역사적 서술이 이루어진곳이기도하다.

 

매천은 사팔뜨기였으나 눈만은 똑바로 뜨고 살았다.그는 위기론을 말하는 동학자의 한계를 벗어나
그가 사는 시대를 증언 하려고 한것이다.그가 고 광순의 격문쓰기를 거부했던것과 그토록 거부의
사실을 통렬하게 후회했던 그 아이러니에 바로 당대 지식인들의 고뇌가 있었다.
 황매천은 고광순 죽음이후 3년간 번민의 찬 삶을 살았다.그리고 결국 자기합리화의 구차한 삶보다는
떳떳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황매천의 동생 황원도 창씨개명에 항거하여 바위로 몸을 칭칭감고
투신하였다.이것이 우리나라 지성인들이 20세기 일제 시대사의 아픔과 더불어 살아야만했던
진실한 몸부림이었다.

 

 

 

황매천은 왜 격문을 써주지 않았을까

....

 

황매천이 안쓴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 거절했다.그 거절의 순간에 느꼈을 지식인의 나약함 그런것을
변명할 길은 없다.황매천은 그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했다.그리고는 다음과같이 필역하고있다.
심부름온 그 사람은 나를 야속하다며 풀이 죽어 돌아갔다.곰곰히 생각한 후에 나는 결국 격문을 하나 썼다.
 그리고 공이 나를 찾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녹천은 필히 왜적이 무서워 격문도
하나쓰지못하는 놈이니 족히 더불어 논의할 인물이 못됀다고 유감스레 생각했을 것이다.

 

 

 

그 뒤는 어떻게 됐을까...

 

고 광순은 연곡사에서 남은 그의 부하들과함께 처절한 항전을 계속했다.그리고 不遠復(불원복[머지않아
국권이 회복할 것이다.])이라고 쓴 부대깃발을 휘날리면서작렬하게 전사했다.
이때 고 광순의 나이 60이 넘은 고령이었다

 

 

왜군은 연곡사를 불태웠다.연곡사뿐만 아니라 건너편에있는 문수암 실상사 태암사등 모조리 불태웠다.
불교 국임을 자초하던 일본 사람들의 짓거리가 모두 이러했다.고 광순의 전사 소식을 듣고 제일먼저
달려온 사람은 다름아닌 황현 황매천이었다.그는 분명 집에 써 두었던 격문을 들고 그 불탄 연곡사로
뛰어갔을 것이다.그 애처롭고 안타까운 심정을 어찌 다 헤아릴수 있으리...

 

 

매천 야록에는 "같은 군에 사는 박 태연과 함께 연곡사로 달려갔다.깨진 기왓장과 조약돌이쌓여있는데
불탄 재는 아직도 불기가 남아 있었다.공의 시신을 덮은 개미둑만한 초분을 보자 왈칵 눈물이 터져나와
통곡을 했다.그 밤으로 사람을 모아 흙을 도두어 무덤을 만들었다.그는 바로 연곡사에 무덤을 만들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던 것이다.

 

 

梅泉詩集,(매천 시집)국립 순천대 박물관 소장

 

 

연곡의 천개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하나
남김없이 싸운 열사들은 있어도
나라는 일그러지고야 마는구나
견마는 흩으러져 논두렁에 누웠고
까마귀떼만 나무그늘 아래로 내려와 앉는다
나 같이 글만 아는 선비를 끝내 뭔짝에쓸것인가
임란때부터 의절지킨 명 가문에 성쇠에 감히 따를수없다
홀로 서풍을 마주보며 뜨거운 눈물을 팅긴다
새로만든 무덤은 높이 솟았으나 옆에핀 듣국화는 누웠도다

 

 

고 광순 순국 3년후 우리민족은 경술국치를 당하였다.그후 오늘날 광복이후 구례군민 모두가 한마음되어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거둬 고 광순의 무덤에 순절비를 세운것이다.

 

 

피아골의 역사는 구한말이후 지금까지 그토록 많은 역사를 가지고있고 나라가 위태로울때마다
그 많은 열사들이 났건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그러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얘기해주는
사람이나 안내문조차 하나 없다.

 

 

구례군에 위치한 지리산 피아골어느덧 겨울의 문턱을 넘는 지금 그 숱한 역사의 페이지는 오늘도 말없이
차가운 겨울를 맞을 것이다.

 

 

 

 

고광순순절비 아래 보물 제152호 연곡사현각선사탑비 (연谷寺玄覺禪師塔碑)가 있다.

 

 

 

 

매천사

 

연곡사를 나와 제비골짜기라는 연곡에 제비 대신 까치 한 마리 햇살을 가르며 유영하고 있는데
매천사를 향하는 마음이 애절해진다.막상 매천사에 도착해보니 빨간 산수유 열매가 지키고
있지만 한눈에 보아도 관리가 부실해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다.

 

 

 

여름 / 황현



㢠似離人境 형사리인경
溪聲最壯時 계성최장시
榴薰催晩稼 류훈최만가
桐溜滴新詩 동류적신시
積雨牛羊倦 적우우양권
窮村蓏果遲 궁촌라과지
一回淸晝夢 일회청주몽
端不許人知 단불허인지

사람 사는 땅을 멀리 벗어난 듯하니
시냇물이 콸콸 쏟아지는 때로다
향기로운 석류꽃 내음은 늦모종을 재촉하고
똑똑 오동나무 물방울은 새 시를 적시누나
이어진 장마에 소와 양은 늘어져 있고
궁벽한 시골 마을에 열매는 더디 익는다
맑게 갠 한낮의 한바탕 꿈
남들은 참말로 몰라야지

- 황현(黃玹, 1855~1910), 『매천집(梅泉集)』 제1권 「갠 여름날[夏晴]」

 

 

 

 

秋燈菴倦懷千古(추등암권회천고)
가을 등잔밑에 책을덮고 수천년 역사를 회고하니
難作人問識者人(난작인간식자인)
참으로 지식인이 되어 한평생 굳게 살기 어렵구나

-황매천 절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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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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