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진주의 진주,진주성에서 논개를 다시 거론한다.
        -기생 논개와 논개 부인



-.일시 : 2008.12.27(토) 13:30~16.30

-.날 씨 :맑음
-.몇명: 홀로
-.어떻게:
자가용 이용
▷진주성
- 호감도ː★★★★

 


몇 년만에 감기몸살을 앓는다.매주 여행과 산행을 하며 지내오던 중 하루 정도 집에서 쉬었더니 그 부작용이 찾아 온것이다.이까짓것하고 목욕탕을 찾아 사우나를 하고 약을 먹고 푹 잤더니 약간 호전되어 책과 인터넷 속에서 놀다가 논개를 보게된다.

 

처음 단초는 논개였다.내가 알고 있는 논개는 기생이었다.그런데 논개 관련 사이트에 들어갔더니 논개는 논개부인이었다.논개의 진실과 사실에 대하여 무척 궁금증이 들어 여러 가지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고자 먼저 진주의 진주라고 할 수 있는 진주성을 뒤늦은 오후에 찾는다.그러고 보니 진주성은 고사하고 진주 시내는 처음 들어가본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에게 있어 주위에 진주 출신 사람들이 많다보니 들은 풍월만으로도 진주에 대해서 꽤 알고 있다고 느꼈고,산행이나 여행을 갈때 남강 혹은 문산 휴게소를 지날때 보았던 진주는 그냥 스쳐갔을 뿐이지만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 가 본적이 있는 것으로 잘 못된 기억이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그러니 결국 제대로 본 것이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참(?)진주를 알기 위하여 진주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다.

 

진주의 상징은 온통 논개이다.그래서 논개를 논해야겠지만 먼저 김시민 목사를 이야기 하는 것이 순서다.

 

진주싸움은 임진왜란 때 진주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으로 제1차의 진주싸움은 임진왜란의 3대첩(三大捷) 중의 하나로 꼽혀 진주성대첩이라고도 하며, 제2차의 진주싸움은 의기(義妓) 논개(論介)의 죽음으로 알려진 싸움이다.

 

1차 진주성대첩을 먼저 알아야한다.


 

제1차 진주싸움은 1592년(선조 25) 10월 5일 진주에 이른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휘하의 왜군 약 2만 명은 수천 죽제(竹梯: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아 죽제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10월 10일에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주했는데, 이 싸움에서는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응원이 적과 아군에게 심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였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3800명이 2만명을 이겨낸 이유는 지난번 TV역사프로그램에서 잘 설명해주었다.비격진천뢰 같은 현대판 수류탄의 역할도 컸지만 무엇보다 김시민 목사의 뛰어난 용병술을 빼 놓을 수 없다.안타깝게도 1차 진주성대첩 막판에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은 왜군 사상자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망한다.이때 대패하고 난 뒤에 일본군 사이에서는 '목사'라는 말이 변형되어 '모쿠소(木曾)'등으로 불리며 이후 일본 문학과 일본연극에서 거의 저승사자 같은 두려운 존재로 각인되며 윤색된다.

 

1차 진주싸움에서 처철하게 깨어져 버린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자존심 회복과 조선의 기를 꺽기 위하여 8개월 가량 뒤에 다시 진주성을 공략하도록 명령을 내린다.이것이 제2차 진주싸움이다.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3년 6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등에게 복수전을 하도록 특별 명령을 내렸다. 왜군은 6월 19일 3만 7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의병장 고종후(高從厚)·이계련(李繼璉)·민여운(閔汝雲)·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끈 3,400명의 병력과 6∼7만 명의 일반민이 있어, 피아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왜군은 귀갑차(龜甲車) 등 특수한 병기로써 파상공격을 거듭하고,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죽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었다.이미 1차 진주싸움에서 사망한 김시민 목사의 사실을 몰랐던 왜군은 당시 유약한 문관으로 2차 진주성 방어전에서 아무런 역활을 하지 못한 목사 서예원이 김시민으로 오인받아 목이 베어져 도요토미에게 전해졌다.


 

2차 진주싸움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논개가 등장한다.

 

 

 

진주는 진주IC를 통과 한 후 오늘이 토요일 오후라서 그런지 몰라도 상당한 교통정체를 겪었다.
그래서 사통팔달의 시원스럽게 뻥 뚫린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진주성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여기가 역사의 장소라는 생각에 머리가 잠시 아찔해지는 느낌
이다.

 

金時敏將軍(김시민장군) 戰功碑(전공비)가 보인다.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호로 이 비는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主將(주장) 김시민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비문에는 1천명이 되지 않은 병력으로 10만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켰다고한다.

 



矗石旌忠檀碑(촉석정충단비)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호로 이 碑(비)는 조선 선조 26년
(1593) 6월 19일~29일 사이 있었던 제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三壯士(삼장사)
金千鎰(김천일), 黃進(황진), 崔慶會(최경회)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하여 세운 정충단
의 비석이다.

 




 

지금 진주성은 휴식의 장소로 변하여 평화로운 모습이지만 중간중간 진주와 관련된 비석을 모아놓았고
용다리 전설의 흔적도 모아놓았다.

 




 

진남루인 북장대 위로 올랐다.이곳에 오르니 대충 내성의 규모와 형세가 파악이 된다.강과 절벽으로 둘러
쌓여있고 산으로 둘러쳐져있어 천혜의 요새가 실감되고 이곳 진주성이 진주의 진주라는 것을 알 수있다.


 

진주박물관을 관람하고 나와 촉석루 안으로 들어간다.촉석루는 평화시에는 영남의 시문을 짓던 풍류의
장소이며 군사적으로는 남장대이다.촉석루 이곳에 서니 晋陽溪山勝致 嶺南第一(진주의 아름다운 산천은
영남의 제일이다.)는 고려조 명종 때의 문신 이인로李仁老 글에 수긍이 간다.

 




 

 

촉석루 안쪽 한켠에 의기사가 있다.의로운 기생 사당의 의미다.맨 먼저 매천 황현의 시가 적힌 현판을
발견한다.

 

"풍천 나루 물결이 상기도 향기로워
그 물에 얼굴 씻고 의랑(논개)에게 절하노라

곱디고운 그 자질로 적을 어이 죽이신고
서방님도 하마 벌써 군에 바친 몸

장수골 어르신네 고장 출신 자랑하고
촉석루 단청은 거룩한 넔 기리도다

생각하면 선조때는 인물도 많아
기생도 그 이름 천추에 빛냈네."

 

매천은 "서방님도 하마 벌써 군에 바친 몸"이라고 하여 논개가 삼장사 중 한명인 최경희의 소실임을
알려주는 동시에 말미에 "기생도 그 이름 천추에 빛냈네"하여 기생임을 알려주고 있다.기생임과 동시에
소실이었을까?

 

진주성이 함락되자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이종인 장윤 등은 남장대(南將臺) 촉석루(矗石樓)에 모여
국토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할 것을 협의하고 최경회 장군의 임종시(臨終詩)를 읊으며
차례로 남강물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남장대(南將臺) 촉석루(矗石樓). / (양태석 그림).

제장이 북향사배(北向四排)하고 읊은 유언시는 아래와 같다.

矗石樓中三壯士 一盃笑指長江水 長江之水流滔滔 波不渴兮魂不死 :
촉석루중에 있는 우리 삼장사 한잔술 마시며 웃으면서 강물을 가리키네.
장강물 출렁이며 도도히 흐르는데 파도가 마르지 않으면 우리 혼도 죽지 않으리

 


 

논개의 영정이 바뀌었다.충남대 회화과 윤여환(55) 교수 작품이다.말 많았던 김은호 화백의 영정보다 다
소 나이 들어보이지만 기품을 갖춘 부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당시 논개의 나이 19살이라고 보면 너무 고
매한 인품을 강조한 전신사조의 부작용처럼 느껴진다.내 눈엔 서른살 정도로 보인다.여하튼 먼저 예경하
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고 사진을 찍는다.10개의 옥빛 가락지도 내눈에 그리 화려해보이지는 않는다.


 

자 이쯤해서 논개에 대하여 알아보자.먼저 조용헌 교수의 논개 사주풀이를 정리해보자.

 

´논개´라는 이름은 개와 관련 있다. 따지고 보면 기생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괴상한 이름이다. 왜 하필
이름을 논개라고 지었을까. 소설가 정비석도 『명기열전』을 쓰면서 이 문제를 추적한 바 있다.
논개가 태어난 고향은 전북 장수군 계내면 월강리 주촌(朱村)마을이다. 육십령 고개를 넘으면 곧바로
경상도 땅 함양이 나온다.

 

논개의 아버지였던 주달문(朱達文)과 어머니인 박씨 부인은 첫애를 낳은 후로 자식이 생기지
않았다.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부인인 박씨가 덕유산 영각사(靈覺寺)에 가서 불공을 드리기도 하였다.
불공 덕인지는 몰라도 첫애를 낳은 지 17년 만에 겨우 아이가 생겼는데, 낳고 보니 딸이었다.



그때가 개띠해인 갑술년(1574년), 9월 3일 술시였다고 한다. 서당 훈장이었던 주달문은 사주에도
조예가 있었다. 만세력을 꺼내서 생년월일시를 짚어 보니 네 기둥 모두가 술戌이다. 말하자면 전부 개
였던 것이다.


 

박씨 부인의 친정인 경상도 함양 사투리에 의하면 ´아이를 낳는다´고 하지 않고, ´아이를 놓는다´고 표현
한다. 그래서 이름을 ´논개´라고 하였다. ´개를 놓았다´는 뜻이다.

 

논개나 영조에게 이러한 갑술이 일주 하나가 아니고 나머지 기둥 세 개에도 전부 걸쳐있다는 것은 강한
기질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갑술의 갑을 보자. 천간의 갑은 나무인데, 아름드리 소나무와 같은
강강한 나무를 상징한다. 쉽게 굽히지 않는다. 갑목 일주 여자들은 일편단심이 많다. 그 대신 애교는 없다.
갑이나 술이나 모두 강직함과 고집을 함축하고 있다.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논개나,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영조의 행동은 공통점이 느껴진다. 물론 환경이 달랐고, 남녀라는 차이는 있었지만 말이다.



또 한 가지 덧붙일 부분은 12지 가운데 개(戌)다. 동물들은 교미를 할 때 대개 같은 방향을 보거나 마주
본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1백80도 반대 방향을 보고 교미를 하는 동물이 있다. 개가 그렇다. 정반대 방향
을 본다는 것은 어떤 일을 할 때 1백80도 방향을 전환할 수 있는 기질로 해석한다. 그래서 술일에 태어난
사람들이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 사례가 많다. 조직의 규칙이나 인사를 혁명적으로 바꾸는 사람들도 뜯어
놓고 보면 술이 많다. 그런가 하면 유명한 지관들의 팔자에도 술일이 많이 발견된다.



육관도사로 유명했던 손석우씨도 사주를 조사해 보니까 무술(戊戌)일에 태어났다. 필자의 풍수 선생님인
의산 선생도 무술일이다. 오행으로 따지면 무(戊)는 토에 속한다. 이런 각도에서 무술을 해석하면 ´땅을
가지고 1백80도 바꾼다´는 의미가 도출된다. 땅을 이용해서 ´회천명´(回天命·천명을 돌린다)을 시도하는
지관들도 역시 혁명가 못지 않게 강력한 자기확신이 요구되는 업무인 것이다.

 

주달문은 딸의 사주가 스케일이 커서 나중에 큰일을 할 줄 짐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귀한 자식일수록 이름
은 천하게 지어야 한다는 관례를 따라서 논개라고 한 것이다. 단 한문으로 ´論介´라고 하면 사주에도 맞을
뿐만 아니라, 점잖으면서도 동시에 천한 이름이 되는 것이다. 사주에 진(辰)·술(戌)이 많으면 총명한 법이
다. 사주에 진이나 술이 3개씩 있으면 ´호문호술(好文好術)´이라고 해서 문장과 술법을 좋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술이 4개나 있었던 논개는 어렸을 적부터 머리가 총명해서 동몽선습·명심보감·논어·맹자와
같은 경전을 수월하게 독파하였다. 13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죽는다. 생활이 어려워진 논개 모녀는 우여
곡절을 겪다가 당시 장수현감으로 와 있던 최경회(崔慶會·1532~1593)의 보호를 받게 된다. 처음에 논개는
최경회의 심부름꾼으로 있다가, 18세가 될 무렵에는 마침 자식이 없던 최경회의 소실로 들어가게 된다.
최경회는 임진왜란 때 경상우병사로 있다가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로 유명하다.
끝까지 싸우다가 같이 전사한 호남 출신의 최경회·김천일·고종후를 가리켜 흔히 ´호남의 삼장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논개가 진주로 간 것은 낭군인 최경회를 따라서였다. 원래 기생신분은 아니었다. 최경회가 왜병과의 싸움
에서 죽자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결심한 논개는 기생으로 위장한 다음에 진주성 공격의 선봉에 섰던 왜장
게야무라를 껴안고 강물에 뛰어든 것이다. 평상시에는 모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사람의 원초적 기질
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 원초적 기질을 나타내는 코드가 사주팔자에 담겨 있다.


 

개가 네 마리나 포진한 ´사갑술´의 명조를 타고났던 논개는 자기 사주의 스케일에 맞는 의로운 삶을 살고
갔다.

 

조용헌 교수의 글 중에서 특히 내눈을 확 띄이게 만드는 것은 "사주에 진(辰)·술(戌)이 많으면 총명한 법이
다. 사주에 진이나 술이 3개씩 있으면 ´호문호술(好文好術)´이라고 해서 문장과 술법을 좋아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라는 대목이다.사실 큰 변화를 의미하는



괴강과 백호대살을 보자.백호대살은, 을미, 병, 정축, 무, 임, 계축이고 괴강은, 경,
, 무이다.눈에 가장 많이 뜨이는 부분이 진과 술이다.괴강은 아예 진과 술로만 이루어져 있다.어리
석은 내가 어리석다라는 것 사실 자체를 아는 것은 그래도 내 사주에 진 하나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우리나라 유일한 여성사당인 의기사이다.현판 글씨도 잘 보면 찰랑대는 남강물 같기도 하고
희날리는 치마 사이로 버선이 나온 듯 한 모습으로 약간의 변형을 두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곧은 절개가
느껴지는 글씨다.

 

50대 중반의 관광객 한분이 논개 영정을 보면서 술김이었느지는 모르지만 듣기 싫은 소리를 한다.


"참 이뿌네.내가 저 시절에 태어났으면 한번 꼬셔볼낀데...저렇게 이쁜애가 왜장 품에 안겼다 안카나"

참으로 한심한 대한민국 국민이다.그냥 성질 같아서는 위 아래 안따지고 그냥 밟아 버리고 싶다.

의암으로 내려가면서 남자 중학생 정도의 두사람 대화는 더 가관이다.

 

"논개가 뭔데...."
"옛날에 좀 놀던 개가 있다 아이가?"

 

논개가 껴안고 죽은 왜장인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기리기 위해 은퇴한 일본인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가 만든 일본 보수원의 논개의 가짜무덤과 영정그림을 붙여놓고 한국과 논개를 능멸했던
짓거리도 피가 거꾸로 솟건만 대명천지에 한국 내에서 어른이나 아이가 이런말을 내 뱉고 있다.


 

참으로 논개에 대해서는 말이 많다.
진주성 내에 있는 유방백세(流芳百世)는 꽃다움을 흘러 보냄이 백대라는 뜻으로, 꽃다운 명예로운 이름이
후세에 오래도록 전해진다는 의미인데 훌륭한 명성(名聲)을 후세(後世)에 영원(永遠)히 전하지 못할망정
없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을 거꾸로 말하는 이 세대는 정말 위태롭다.

 


 

 

향토사학자 추경화는 논개는 진주출신 기생이라고 한다.


 

지난 6월 27일 EBS에서 방영한 애국투사 논개의 내용이 잘못되었으므로 이를 시정코자 한다. 방영 내용
중에 기생 논개를 사대부집 출신 또는 남의 부인으로 소개한 것은 매우 잘못되었다.논개는 영조 때 왕명에
의해 편찬된 <여지도서>와 순조 32년(1832)의 <진주목읍지>에 진주의 의기(義妓)로 기재되었고 정조 23
년(1799)에 편찬된 <호남절의록>에도 의기로 기재되었다.



논개에 대한 최초 기록인 유몽인(1559∼1623)의 어유야담에 진주의 관기로 분명히 기록되었다. 영조 16년
(1740)에는 병사 남덕하의 계청에 의해 의기사를 창건하였고 정조 3년(1779)에는 의기사를 보수하였다.
순조 때 찬진된 <영남읍지><경사도읍지>에도 의기 논개로 소개했다. 광무 7년(1903) <호남삼강록> 논개
조에는 논개는 장수의 관기인데 진주 최 병사가 좋아했다는 기록부터 잘못되기 시작하였다.



최 병사가 선조 10년(1577)에 장수 현감이었을 때 논개는 4세 어린아이였다. 그러므로 논개가 어느 분의
부인 또는 배위라는 방송 내용은 말도 안 된다. 논개의 성씨가 주씨라고 처음으로 주장된 시기는 전북
장수군에서 의암사 건립추진 발기회가 조직된 1954년경이다. 1954년 이전의 어느 문헌에도 논개의
성과 본을 밝힌 문헌이 없다.



제2차 진주성 싸움 때 진주성이 함락되자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고 논개가 부인옷을 벗고
기생옷으로 바꿔 입고 술취한 왜장을 안고 남강에 빠졌다고 방송하였으나 1632년에 완성된 <진양지>와
선조실록 26년 7·8월조에 의하면 촉석루는 계사년(1593)에 방화로 불타버렸다 했으며 왜병들은 군·관·민
을 도륙한 후 각기 하동·의령·삼가·지라산 등으로 떠났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승전축하 대연회는 없었다.



현재 진주 남강변의 의기사는 1983년 7월 경남도 문화재 자료 7호로 지정되었고 도유형문화재 353호로 지
정된 의암 사적비에는 의기 논개 지문이란 현판이 있다. 의암은 2001년 9월 필자 등의 청원에 의해 경남도
기념물 235호로 지정되었다. 우리 진주시민들은 의로운 기생 논개를 추모할 뿐 남의 부인을 수백년간
추모 한 것이 아니다.
논개님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그의 신분이 천한 기생이었으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단 하나의 목숨을 바쳐 희생·순국하셨다는 점이다.


 

1919년 3·1운동 때 진주기생 6명이 시위를 전개하자 사람들은 의기 논개의 정신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그런 반면에 논개는 기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김진영 장수문화원장의 글을 살펴보자.

 

논개는 임진왜란 때 큰 공적을 남긴 위대한 장수인이다. 그러나 논개와 그녀의 가계, 생장과정, 그리고
신분에 대해 정확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621년 어우당 유몽인이
저술한 “어우야담”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헌에는 논개의 가계와 생장과정에 관한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그녀에 대해 많은
억측과 이론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던 중 1700년대 초에 진주 사람들이 논개의 순절을 포양하도록 계청하였던 바, 조정에서는 그녀의
가족을 찾아 포상하라는 윤허가 있었다. 경상우병영에서는 경상도 일대에 관문을 뛰워 사문했으나
논개의 흔적을 찾을 길이 없어 포상하지 못했다. 그 뒤 꾸준히 논개 사적 조사가 진행되어 1700년대
중반부터 권적의
“경상우병사 증 좌찬성 최공의 시장”, “호남절의록”, “호남상강록”, “호남읍지”,
“동감강목”, “일휴당실기“,”매천야록“등의 문헌과 고노상전 200년의 구전설화등이 쏟아져 나오면서
논개의 가계와 생장과정 등의
행장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를 정리해보면 논개는 이름, 호는 의암, 성은 신안 주씨이며,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서 아버
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특이하게도 논개는 4갑술(갑술년, 갑술월, 갑술시
-1574.9.3밤)의 사주를 타고 태어났다.



아버지 주달문은 딸아이의 사주를 짚어보고 계집애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뻐하였다. 이름을 논개라고
지은 것은 딸을 술시에 낳았으니까 개를 놓은 것과 같고, 거꾸로 읽으면 ‘놓은 개’, 즉 ‘논개’가 되므로
그렇게 이름 붙이면 역신도 시샘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다.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다.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이었다. 논개 나이 다섯 살 되던 해에 뜻하지 않게 아버지를 여의었다.

 

의지할 곳 없던 모녀는 한 마을에 사는 숙부 주달무 집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런 어느 날, 숙부는
노름으로 돈을 탕진하고 이웃 마을에서 밥술깨나 먹고 사는 김풍헌에게 찾아가서 조카를 민며느리로
몰래 팔고 달아났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논개 모녀는 부랴부랴 외가로 일시 피신했으나 김풍헌의 제소로 장수
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의 재판관은 최경회 현감이었다. 최 현감이 자초지종을 캐보니
달아난 숙부 주달무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논개 모녀를 무죄 방면했다.



그러나 갈 곳 없는 두 모녀를 최 현감은 내아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지내도록 배려했다.
이런 운명적이 인연으로 최경회와 논개는 만나게 되고 최 현감집 식솔이 되었다.

 

논개는 잔심부름이 끝나는 대로 틈틈이 김씨 부인이 일러준 충효열의 뜻을 가슴 깊이 새겼다.


 

세월이 흘러서 논개 나이 17세가 되던 1590년 최경회가 담양부사로 재직할 때 두 사람은 부부의 예를
올렸다.

 


그 해에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화순으로 가면서 논개를 고향 장수로 보냈다.

 


2년뒤 임진년(1592)에는 역사상 980여 회의 외침 중 가장 처참했다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상중인
최경회는 전라우도 의병장이 되어 옛날 현감을 지냈던 장수에 들러 의병을 모집하고 논개도 만났다.
실로 2년 만의 해후였다. 최 의병장이 월강리 앞 들판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의병들을 훈련시킬 때
논개는 동네 부인들을 모아서 의병들의 수발을 들었다. 최 의병장은 훈련된 500여 정예부대를
골자부대로 이름 짓고 무주 쪽으로 진격한 뒤 무주 우지치전투에서 첫 대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산음,

지례, 개령, 성주등 경상도 일대를 누비면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다.


 

1592년 10월, 1차 진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 데에는 최경회가 이끄는 호남 출신 의병들의 성
외곽에서의 맹활약이 크게 주효했던 것이다. 최경회는 그간의 의병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영전되어 진주성으로 입성했다.



그 소식이 장수에 머물고 있던 논개에게도 들려왔다. 논개는 벅찬 가슴을 억누르고 한시 바삐 진주로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남복으로 변장을 하고 진주로 가는 도중에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오랜만에 논개를 본 최 병사는 한없이 반가웠지만, 회포를 나눌 겨를이 없었다. 10만이 넘는 왜군이
진주성으로 몰려오고 있다는 첩보를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동분서주해야

했던 것이다.


 

6월 19일, 드디어 왜군은 10만여 대군을 사방으로 나누어 진주성을 본격적으로 공격해왔다. 11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 끝에 진주성은 무너지고 7만에 가까운 민관군의 시체가 산을 이루었다.

 

성은 아수라장으로 초토화됐다.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 진주성 3장사는 성이 함락된 데 대한
책임을 지고 왕이 계신 북쪽을 향해 하직인사를 올린 후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국했다.



한편 전투가 한창일 때 논개는 성안에서 수발을 열심히 들었지만, 성을 빠져나간 후일을 도모하라는
최 병사의 엄명에 성을 빠져나와 외진 곳에 은신하면서 전황을 살폈다. 성이 함락되고 최경회 병사가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논개는 무엇인가 비장한 결심을 했다. 마친 칠월 칠석에 왜군이 촉석루에서
진주 관기들을 불러놓고 전승 축하연회를 갖는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논개는 이때를 놓칠세라 마음에 다지면서 관기들 틈에 끼여 연회장까지 들어갈 요량으로 관기들이
촉석루에 들어가는 시간과 길목 등을 정확히 알아두었다. 그러고는 몸에 지니고 있던 금붙이로 여름옷
한 벌을 곱게 장만하고 가락지 등 필요한 물건도 구했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논개는 관기처럼 곱게 단장하고 시간에 맞춰 길목에 서 있었다. 논개는 관기들이
촉석루를 향해 들어갈 때 뒤에서 천천히 따라 가다가 발길을 돌려 촉석루 아래 강가의 바위 쪽으로
내려갔다.


 

연회장으로 가면 정체가 탄로날 위험성이 있으니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요염한 자태를 드러내어 상대방을
유인해 보자는 계략이었다.



연회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술에 취한 왜장들이 문득 강가의 바위 쪽을
내려
다보았다. 웬 선녀처럼 아름다운 젊은 여인이 강가의 바위 끝에 서서 자기들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는 것이었다.왜장들은 한눈에 반하여 금시라도 여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정체를 몰라서 망설이고
있었다.

 

돌연 육척장신의 체격이 장대한 왜장 하나가 논개쪽으로 다가가면서 자기에게로 오라며 소리쳤다.
논개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하면서 왜장을 유인했다.



왜장은 논개의 아름다운 자태에 매혹되어 자기도 모르게 논개 앞으로 다가갔다. 논개는 미소를 지으며
손에 가락지를 낀 팔을 벌려 기쁘게 맞이하면서 왜장을 껴안으며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절했다.
논개가 살해한 왜장은 힘세고 용맹스럽기로 유명한 맹장 게야무라 로쿠스케였다. 논개가 순절한
바위를 후인들이 의암이라 이름 짓고 논개와 동일시하여 호가 되었다.



이상이 위에서 논의된 문헌, 설화 등을 집약해서 구성한 의암 주논개의 일대기이다. 앞으로는 논개의
가계, 생장과정, 신분 등에 관해서는 더 이상 우를 범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나아가 의암 주논개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첫째로 제 몸을 불살라서 주변을 밝히는 인애정신, 둘째로
패권주의에 맞서 끝내 항거한 의용정신, 셋째로 사대부도 아닌 아녀자의 몸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지아비를 사랑한 충열정신은 만인의 귀감이 되는 바, 그 위대한 교훈을 세상에 널리 홍보하여
어린이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본받게 하는 것이다.


 


 

여하튼 주논개는 「의암부인 신안주씨」가 해주최씨의 족보에 오른 시기는 1975년부터였다. 그 당시
해주최씨 문중에서는 「의암부인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를 거쳐 다수의견에 따라

족보에 올렸다고 한다.

 

서사시 ‘논개’와 <논개> 평전을 발표한 문학가 정동주씨는 “논개의 의로운 죽음이 조정으로부터
공인을 받는 데 147년이 걸렸고, 그가 기생이 아니라 의병장의 아내였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400여년이
걸렸다"고 했다.

 

나라를 위한 충성은 명예를 가진 감투 쓴관리들만이 지키는 것이 아니었으며 서민들이 힘을 합쳐
의병이 일으키고 농부들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쟁터로,부녀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힘을 다하여 이
나라를 지켰왔다.그래서 진주시민들은 진주대첩의 영광을 안겨준 김시민 장군을 존경하면서도 더욱
논개를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논개는 전북 장수군 계내면 월강리 주촌(朱村)에서 태어나 진주 촉석루 의암에서 죽었으며 현재 그의
묘는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에 있다.

 

 

論介(논개) -변영로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情熱(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娥眉(아미) /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 죽음을 입맞추었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江(강)물은 / 길이길이 푸르리니 / 그대의 꽃다운 혼 / 어이 아니 붉으랴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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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
,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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