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석산▲화수미제를 풀기위한 2008년 송년산행과 새로운 화수미제 2009년
- 운림산방,진도 홍주,동석산,세방낙조에서 듣는 진도아리랑과 강강술래,그리고 이순신




- 언제 : 2008.12.31 (목) 07:00~22:00
- 얼마나: 2008.12.31 14:00~16:00(2시간)
- 날 씨 : 눈,흐림
- 몇 명: 홀로

- 어떻게 : 자가용이용

▷운림산방-쌍계사-쌍정리 진도홍주 화화자 댁-동석산-세방낙조-녹진전망대

- 개인산행횟수ː 2008-34[W산행기록-213P산행기록-353/T703]
- 테마: 송년산행
- 산높이:동석산 240M
- 호감도ː★★★★★

 


2008년이 역사속으로 사라져간다.제 17대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새해 사자성어로 시화연풍(時和年豊)을 선정 발표했었다. “시화연풍은 나라가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든다는 것”이라면서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국민이 화합하고 해마다 경제가 성장한다 그런 뜻을 담고 있다”고 설명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호질기의’(護疾忌醫)였다. ‘호질기의’는 중국 북송시대 유학자 주돈이가 통서(通書)에서 남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 세태를 비판하면서 “요즘 사람들은 잘못이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바로잡아 주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병을 감싸안아 숨기면서 의원을 기피해 자신의 몸을 망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 데서 비롯된 사자성어다.

 

증시라고 별다를까? 증권회사에 몸담는 나로서도 2008년은 거세게 추락하는 폭포에 몸을 실은 느낌이었다.지난 시월 불과 한달만에 500P가 하락하는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2008년 시작은 1891P였는데 2008년 마지막 지수는 1124P였으니 767P가 추락한 것이다.보잉 비행기 기종이름 같은 747정책(7:7%경제 성장 4: 4만불 국민 소득 7:70만 일자리 장출)의 첫해 성적은 주가 41% 하락으로 결론이 났다.

 

여하튼 전일로서 2008년 시장은 마감되었으며 2009년을 맞이하기 위한 씻김굿 같은 2008년 송년을 위한 다목적 포석의 장소를 찾았고 그곳은 바로 자동차로 왕복 800KM의 먼길이지만 진도로 정해져 그곳을 향한다.

 

왜 진도인가? 증권 시장에서는 파란색 보다는 붉은 색을 원한다.우리나라 술 중에서 유독 붉은 빛을 띠는 술은 진도홍주가 유일하다.그러니 멀더라도 단지 홍주를 구하기 위해서도 찾아가 보아야 할 판이다.주역 64괘의 맨 마지막 괘가 바로 '화수미제(火水未濟)'괘이다.화수火水만 보아도 홍주가 제격이다.물은 물인데 불의 성격이면 술이고 그 술은 역시 홍주가 제격일 것이다.미제(未濟)는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를 가리킨다.미완의 상태를 의미하는 괘이다. 주역에서 마지막 괘인 64번째 괘를 미완의 상태로 규정한 의도는 무엇일까? 여지를 두기 위해서이다. 여지를 남겨 두어야만 다음 패러다임으로 넘어갔을 때 운신의 폭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화수미제' 괘는 일 년 열두 달에 비유하면 12월 하순쯤에 해당한다. 그해의 끝에서 신년을 준비하는 시점인 것이다. 다른 때는 몰라도 이때는 반드시 술을 한잔 마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역에서 술을 한잔 해야 한다고 나오는 대목은 바로 이 '화수미제' 괘이다. 괘의 끝자락인 상구(上九)에 보면 '유부우음주(有孚于飮酒)면 무구(無咎)어니와 유기수(濡其首)면 실시(失是)하니라'는 대목이 나온다. '술을 마시는데 미더움을 두면 허물이 없거니와, 머리끝에 올라오도록 과하게 술을 마시면 정도를 잃는다'는 의미이다.하나의 패러다임이 끝나고 다음 패러다임으로 넘어갈 때에는 술을 마실 필요가 있고, 단지 과하게 마시지만 않으면 된다고 보았다.


 

왜 전환기에 술을 마셔야 하는가? 남은 미련과 앙금을 털고, 서로 화해를 하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앙금을 털어야 화해가 된다. 앙금을 털지 않고, 화해가 되지 않으면 다음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지 못한다.

 

또한 2009년 기축년(己丑年)은 화수미제의 괘이다.주역에 보면 미제는 형하니 소호흘제하여 유기미니 무유리하니라. 단에 왈 미제형은 유득중야요 소호흘제는 미출중야요 유기미무유리는 불속중야라 수불당위나 강유응야니라. 화재수상이 미제니 군자이 하여 신변물하여 거방하나니라.(未濟 亨 小狐 汔濟 濡其尾 无攸利. 彖曰 未濟亨 柔得中也 小狐汔濟 未出中也 濡其尾无攸利 不續中也 雖不當位 剛柔 應也. 象曰 火在水上 未濟. 君子 以 愼辨物 居方)라고 했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간(艮)방에 있어 나무(木)에 해당하는데, 기축년은 꽁꽁 얼어붙은 흙(土)이다. 즉 2009년은 ‘거목이 언 땅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잉태하는 시기’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많은 고난이 있겠지만 새로운 아침을 기다리는 시기이기도 해 결코 비관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즉 미제는 어린 여우가 냇물을 거의 건너가려 할 때 그 꼬리를 적시는 형이다. 아직 험난함 속에서 완전히 나오지 못한 것으로 꼬리를 물에 적시니 이로울 것이 없다. 사회적으로는 대형 교통사고와 화재, 홍수가 많이 날 것이다.나 또한 어느해 보다 2009년이 힘든 시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어느해 보다 슬기와 지혜를 모아서 헤쳐나가야 할 시기로 본다.그것이 어려우면 기축년 소처럼 우직하게 말없이 맡은 바 본분에 충실하며 해동이 될 때까지 미래를 준비해야 하는 기회로 삼을 계획이다.경제회복은 2009년 4사분기로 예상된다.이렇게 어려울때는 아주 쉽게 분열과 다툼이 생긴다.따라서 거꾸로 말하면 그 어느때 보다 모두 합심해 어려움을 이겨나가야 하는 해다.

 

 

 

11:23~12:21
오랫만에 정태춘의 여드레 팔십리를 들으며 영남에서 호남으로 경계선을 넘자마자 내리든 눈이
목포를 지나자 세차게 내린다.가장 먼저 찾은 곳은 운림산방이다.운림산방은 세계에서 유일한 일가직계
4대의 화맥이 200여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대화맥의 산실이다.

 


조선조 후기 남종화의 거봉이었던 소치 허련선생의 화실의 당호로 원래 운림각으로 불렀다.소치小痴라는
아호는 스승인 추사선생께서 내려주셨다.이후 미산 허형,3대 남농 허건과 임인 허림,그리고 4대 임전허문
으로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본관은 양천허씨로 결국 가락종친회 소속이니 의미는 남다르다.



소치선생이 심은 백일홍과 연지(일명 운림지) 뒤로 소치선생이 그림을 그리던 화실이 보이고 뒤로 소치
선생이 기거하던 생가인 초가지붕이 보인다.우측엔 또다른 기와동으로 소치기념관이 보인다.







기념관안에는 한눈에 소치부터 4대 허문의 그림까지 감상 할 수 있다.그의 그림은 구름과 안개의 화가라는
명성대로 운무산수화라는 독창적인 화풍을 보여주는데 현대적 감각까지 돋보인다.

그림 감상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더욱 기세좋게 눈이 내린다.운림산방 자체가 한폭의 산수화이며 동양화
이다.뒤로 점찰산이 보인다.





운림산방 바로 옆에 점찰산 쌍계사가 있다.대웅전에 둘러 예경하고 나오니 눈발은 약간 가늘어졌으며 드문드문
햇살의 약한 빛이 두터운 구름장 사이를 비집고 있다.





 

13:00
명품의 술 진도홍주를 찾아나선다.옛날엔 다른 사람을 따라 갔기 때문에 길을 몰라도 되었지만 오늘은 자동차
네비게이션을 이용하여 찾는다. 고려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온 진도홍주는 일명 지초 주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약 1,100년 전부터 진도에서만 제조되고 있는 대한민국 유일의 홍색을 띤 알콜함량 45%~50%의 증류주로
주원재료는 쌀과 보리, 그리고 영약으로 불리는 지초 등 3가지이다. 홍주는 색깔이 붉고 맛이 독특하며 음주 후
자고 나서도 숙취와 갈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진도홍주 제조비법이 진도 양천 허씨 문중에 대대로 전해져 1994년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허화자 씨에게 전승,
보존되고 있다.그래서 허화자 할머니를 찾아가는 것이다.주소는 전남 진도군 진도읍 쌍정리 38번지다.생각보다
쉽게 집을 찾았다.팔순의 할머니는 이제 한걸음을 옮기시면서도 끙끙 앓는 소리를 입에 달고 사신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서 부산에서 왔다고 했더니 먼곳에서 왔다며 반가워하시고 밥은 먹었냐고 하신다.
꼭 외할머니집에 간 느낌이다.약간의 소찬과 술을 내 올 기세라 자동차를 가져와서 술을 할 수 없다고 죄송
하다고 말씀드리며 사양했다.

 

옛날에는 소주 대병으로 받아왔는데 이번에 제법 구색을 갖췄다.전용 병도 보이고 포장지도 있다.예쁘게 보자기
마무리 포장도 해주신다.약간만 늦게 갔으면 구하지 못할 뻔 했다.내 뒤에 세사람이 왔는데 이미 만들어 놓은
술이 동났기 때문이다.700ml 두병에 5만원이다.이로서 화수미제(火水未濟)를 넘기고 또 다른 화수미제를 맞을
준비는 끝났다.




 

동석산으로 가는 도중 점심식사를 한다.6,000원 백반정식에 그릇 숫자만 헤아려보니 25개다.눈발은 굵어졌다
가늘어졌다를 반복한다.마을로 들어서니 동석산이 그림처럼 펼쳐져있다.

 

 

 

산행출발지는 천종사 사찰이었다.동석산은 아래 천종산삼이 있을 것 같은 위치에 천종사가 있었다.
좌측으로 진행 후 미루바위와 미륵좌상 사이 골짜기로 올라서 칼날릿지는 우회해서 넘고 동석산 정상을
밟은 후 우측으로 360도 회전해서 원점회귀 해야겠다는 예정을 세우고 출발한다.

14:05~15:37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으로 바람이 불면 산에서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처럼 들린다는 동석산(銅石山)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이다. 산길은 생각보다는 잘 정비되어있었다.길 아닌 좌측의 바위로 한번 붙어볼까했는데
눈이 온 후 바위를 조금 적셔 놓아서 미끄러워 그대로 등산로를 따른다.가끔 암벽을 오르다 추락해서 병원에
실려간 신문기사도 본적이 있고 무엇보다 오늘은 나 이외 산행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되도록 이면 안전
산행이 최우선이다.





 

 

추운날씨에 눈발이 날려서 많이 껴입었더니 땀이 제법 흐른다.높이는 얼마 아닌데 가파르기 때문이다.
"미륵좌상"이라고 이름 붙인 곳은 얕은 파다만 동굴처럼 속이 파였는데 그곳에 앉아보니 산과 강이 이쪽으로
달려오듯 펼쳐져있다.

 

 



 

이후 도포자락 바위 위로 이어지는 큰애기봉으로 오르는데 별 어려움이 없는 릿지구간이다.발 아래 천종사와
주차장이 보인다. 



 



 



 

 

다소 가파른 구간은 링이 설치되어 있어서 문제가 없다.
 

문제는 두 번째 링이 있는 구간이었다.제법 높이도 높지만 이곳을 굳이 오를 필요가 없었는데
산길이 그렇게 놓여있으니 올랐을 뿐이었다.이곳을 오르지 않고 바로 좌측으로 트레버스해야
했지만 일단 오르고 보니 칼날 릿지로 동석산으로 가는 길이 보이지 않았다.









 

누가 확보해줄 사람도 없고 자일이나 슬링도 없는 상태이니 링을 붙잡고 다시 내려가야했다.오르때는
시야가 확보되지만 내려올때는 시야가 가려 다소 애을 먹었다.그러나 어느정도 키가 되고 롱다리는
아니지만 링을 밟고 내려올만큼의 다리길이는 되어 무척 다행이었다.키가 작거나 다리가 짧으면 고생
하겠다.

 

좌측으로 트레버스하며 우측에 벽을 두고 걸음을 옮기니 가파르지만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니다.

릿지를 건너 동석산 정상에 섰는데 별다른 정상석도 없다.다만 구름장 사이로 햇살이 내비쳐 축하를 해주는
느낌이다.마지막으로 나타나는 릿지를 넘어 우측으로 회전하여 다시 주차장으로 향했다.

 

16:20
세방낙조 전망대로 향한다.저물면서 빛나는 바다,낙조가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는 그곳에 도착하니
다시 눈발이 거세져 정상적인 일몰은 어렵게 되었다.눈은 내렸지만 해넘이 행사는 시작된다.

 


진도 구기자 차를 주어 언몸을 녹였고,굵은 눈발속에서도 터진 구름장 사이로 약간의 빛은 내린다.
진도 아리랑과 진도 울돌목 명랑대첩과 관련있는 진도 강강술래는 이곳 진도의 또 다른 명품이었다.

 

내가 익히 알고 있는 간단한 강강술래가 아니었다.애절하면서도 신명난 가락이 2009년을 맞을
준비가 되었냐고 다짐을 받는 느낌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군제독 이순신 장군.... 명랑대첩이 있기 전 아무런 실권도 없었던 백의
종군 시절부터 눈을 감고 그때를 떠올려 보자.

 

....

경상 우수사 배설은 원균 함대가 전멸하던 날 밤, 미리 겁을 먹고 12척의 전선을 이끌고 함대를 이탈
하여 하동 노량진으로 도망쳐 왔었다. 이 12척의 패잔선을 점검해 보니 신속한 수리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무런 실권이 없었던 이순신은 그저 보고 들은 상황을 정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원수부에 올렸다.

 



1. 경상 우수사 배설은 전의를 상실하고 전쟁 공포증에 걸려 있음.
2. 군함 1척당 190명이 필요한데 현재 겨우 90명 이하로 격감되어 있음.
3. 군량미가 부족하여 12척의 함대 장병들이 기아 상태에 있음.
4. 전선 함포용 화약, 피사체 등이 절대 부족한 상태임.

 

이런 배를 개조하고 수리하여 다시 결전에 나선다.

....

명량 해협은 평균 1500(약 500m)자의 폭으로 진도와 화원반도 사이의 수로이다. 이 해협의 좁은 곳은
900(약 300m)자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그 양쪽으로 암초가 널려 있어 배가 이용할 수 있는 곳은 그나마
400자(약 130m) 정도뿐이다. 또 수로의 물살이 빨라 물살의 방향만 잘 이용하면 적을 능히 격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강술래가 울려퍼지고...





 

마침내 이순신 제독의 기함에 전 함대의 총공격을 알리는 깃발이 올랐다. 기함을 주시하며 휴식을 취하던
9척의 전함들은 일제히 함포를 발사하며 달려들었다. 이순신의 기함 한 척에 진땀을 흘리며 3시간을 소모
한 일본 함대는 혼비백산하여 뱃머리를 돌려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큰 실수였다.

 


전투 지원을 위해 후방에서 좁은 해협을 따라 올라오던 함선들과 탈출하려는 함선들이 서로 충돌하게 되었고,
이를 피하려다 양 옆의 암초에 걸려 침몰하는 등 일본 함대는 막심한 피해를 입게 되었던 것이다.



적을 단번에 격멸시키기 위하여 물의 흐름이 가장 빠른 신시(申時)까지 전투를 질질 끌며 기다려 왔던 것이다.
또 전투경험이 적은 조선 수군에게 단 1~2척의 함선으로 수백척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감과
결전의 의지를 갖게 하는 것과, 그 반대의 효과를 왜군에게 주는 고도의 심리전 전술이었던 것이다.



이순신 제독의 절묘한 전술이 극치를 이루며 세계 해전 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서로 먼저 빠져나가려는 다툼으로 인하여 연쇄적으로 좌충우돌하였고 또 해협의 양측 암초에
부딪쳐 처절하게 파선되어 갔다. 무사히 빠져나간 듯 싶었던 함선들도 시속 11노트라는 가공할 속도로 흐르는
물살을 타고 마치 나는 듯 추격해 온 조선 함대의 함포에 맞아 침몰되어 갔다. 이 수라장 속에서 무려 100여 척
이상의 일본 군함들이 격침되었고 멀리서 대기하던 90여 척만이 도망갈 수 있었으나 그들도 거의 치명적인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전투는 끝났다. 200여 척으로 구성된 최정예 함대에 10만 대병을 싣고 서울로 상륙하려던 일본군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은 불과 12척의 이순신 함대에 의하여 200여 척의 대함대 중 무려 133척을
잃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일본은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호랑이가 버티고 있는 한 서해를 돌아 진격하려던 작전
에 근본적인 수정을 가해야만 하였다.

....

18:00
차를 몰아 다시 진도를 빠져나오며 마지막으로 녹진전망대에 올라 저물어가는 2008년 세모에 서서 진도대교를
바라본다.화수미제의 2009년.... 꼬리를 적실지언정 미리 겁 먹을 필요는 없다.

 








 

尙有十二隻 微臣不死 상유십이척 미신불사
아직도 배가 열두척이나 남았고, 미천한 신 또한 죽지 않았습니다.

- 이 순 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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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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