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시라다케▲1박2일이 마치 500년 역사의 경계를 넘는 듯.

 


- 언제 : 2009.2.28 (토) 08:00~3.1(일) 16:20
- 얼마나: 2009.2.28 13:35~15:55(4시간 20분)
- 날 씨 : 대체로 흐림
- 몇 명: 13명

- 어떻게 : 부산 산정산악회동행

- 스모 주차장-폭포-굴바위-시라다케 신사-시라다케(白岳) 세이칸보(
西岩峰)-가미자카(上見坂)
- 개인산행횟수ː 2009-5[w산행기록-218/T708]
- 테마: 해외산행
- 가져간 책: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
- 산높이:시라다케 세이간보 519M
- 호감도ː★★★★

 


대마도는 부산에서 49KM정도의 지근거리다.날씨가 좋은 날에는 영도의 봉래산에서도 보이고 김해
봉화산에서도 보이는 곳이다.이렇게 가깝다보니 사실 우리나라 땅이 안된 것이 오히려 이상한 섬이다.

 

세종 45년 신유한은 "토지가 척박하여 백물(백가지 물건)이 채 생산되지 않는다.오로지 고기를 잡고
해초를 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데 대마도 서쪽으로는 조선의 초량(49.5KM,부산시 초량동)이
보이고 북으로는 나가사키(長崎,142KM)에 통하는데 바다 가운데 도회와 같다."고 했다.이곳 대마도
사람들은 무역으로 생필품을 얻어 생활을 해야했는데,그 무역이 끊어지는 기간이 길어지면 왜구로
변하여 우리나라 남부지역을 약탈해갔다.

 

그래서 고려시대에는 이곳을 정벌,만호를 파견하여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의 3대 임금 태종
(세종1년)은 "삼군도제찰사" 이종무로 하여금 병선 122척과 장병 17,385명을 이끌고 가 대마도를
정벌하게 했다.이때 대마도주는 조선을 주군으로 받들고자 청해옴으로 세종 2년 10월에 예조판서
허조를 통해 대마도를 경상도로 편입시키고 군관의 관례대로 관인을 사여하면서 우리가 다스려왔다.
조선의 대마도 해적 소탕이나 대규모 정벌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대마도주의 지위를 박탈하거나 바꾼
역사는 없다.이는 대마도주의 지위가 한 성씨로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후 일본의 메이지유신 이후 번이 없어지고 중앙집권 체제로 근대국가가 형성되면서 대마도주는
다시 일본으로 붙게된다.일본의 명치 유신때 일본의 정식 영토로 편입되면서 일본 정부의 관리가
대마도주의 통치권을 넘겨 받기 시작했다.아쉬운 점은 여러 정치적인 변수가 있었겠지만, 대마도에
대한 대규모 정벌이 이루어진 조선 세종시기에 대마도주를 조선으로 불러들이고 조선의 관리로
대마도를 통치하게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무엇보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관광자원으로서나 영토의
확장개념으로 보나 아까운 땅이지만 조선시대 관점으로서는 산만 있고 농사지을 비옥한 토지가
없었던 점 때문에 거의 방치해 버렸다는 점이다.한마디로 조선의 관점에서는 조선을 괴롭히지만 않으면
내 버려둔 것이다.

 

13:35~16:03
작년 9월 이후 세계는 실제적으로 대공황에 빠졌다.그런 이유로 가장 직격탄을 받는 시장 중
하나가 증시다.요즘 같은 시절엔 생존을 위한 노력이 가중 될 수밖에 없고 또한 회사에서도
헌신적인 노력을 원한다.그래서 개인적으로 심기일전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산행지로 선택한 곳이 대마도 산행이었다.2월 28일과 3월1일(삼일절)이라는 시기의 결정
도 절묘하였다.


 

아침 8시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 모여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넌다.그렇게 도착한 곳이 이즈하라
항이었다.그곳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산행들머리인 스모주차장에 도착했다.주차장에서 보니
시라다케산의 쌍봉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임도 같은 산길을 따라 걸으니 키 큰 고사리류와 동백
꽃, 그리고 삼나무(스기)와 편백나무(히노키)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16:13~16:27
넓은 임도는 폭포가 있는 곳에서 오솔길 같은 산길로 변하며 실제적인 오름은 여기서 시작된다.
나무들이 울창하여 좀처럼 햇볕이 새어들지 않을 정도며 대체로 습기가 많아서 이끼류가
많아서 온통 초록빛이다.

 



 



 



 

16:29~16:36
어떤 나무는 바위 위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며 Naver give up을 외치는 것 같다.
수목이 풍부하여 나무만 보고 걷는 듯한 느낌이지만 가끔씩 나무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사진을
찍기엔 더 없이 좋은 조명장치다.







 

16:54~15:34
그러다 일순 방향이 우측으로 꺽어지는 곳이 나오는데 여기가 시리다케 신사의 삼거리다.
직진하면 가미자카로 직진하기 때문에 여기서 우측으로 꺽어 40분 오르면 시라다케(白岳)
에 오르게 된다.이후엔 더욱 경사도 가파라진다.

 

나무 뿌리들이 산길을 가로지르고 신사의 작은 당집이 보인다.시라다케의 봉우리가
보이고 고개를 넘어 방향을 몇 번 틀고 나면 흰색의 암봉지대에 다다르게 되는데 이곳이
정상이다.

 



 



 



 



 

15:39~15:48
시라다케는 흰산이라는 의미로 실제 바위가 푸른 숲 위에 있어서 유난히 희게 보인다.
산 정상에 서면 변변한 이정석도 없이 흡사 오토바이 번호판 같은 철판에 백악이라고
씌여져 있다.내가 앉은 서암봉(세이칸보) 뒤로 동암봉(토칸보,東岩峰)이 보이고
그 뒤로 아소만이 보인다.

 

일본의 산은 우리나라 산과 비교해보면 이정표도 별로 없고 리본도 거의
없다.어쩌다 보는 리본은 거의 한국의 산악회가 원정와서 붙여놓은 것이다.
그 만큼 일본은 도시도 깨끗하지만 산 또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가깝다.

 

산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시라다케 신사 삼거리로 내려와서 가미지카
로 가는데 계속 이어지는 삼나무와 편백나무 숲길을 지겹도록 걷게 된다.그러고 보니
시라타케에서 일본인 등산객은 단 한명도 보지 못하였으며 17시 55분에 산행을 마쳤다.
 





 



 



 

 

20:34
산행을 마치고 이즈하라(嚴原)의 대아호텔로 돌아와서 여장을 풀고 "야마짱(산꾼)"이라는 선술집에
들러 가볍게 한잔한다.선술집 중 한곳은 과거에 한국 손님과 트러블이 있어서 한국인은 받지
않는다는 문구가 있어 술맛이 개운치가 않다.

 

이즈하라 시내 중심에는 엄원본천(嚴原本川)이라는 개울이 있는데 그 개울 옆으로 선술집들이 있다.

 

물이 대체로 깨끗해서 물고기들이 육안으로 보이고 이곳 면세점 앞 다리에는 조선통신사들이 오고간
그림이
붙여져있다.이 개천을 조선통신사들은 1회에 300~500명이 12번을 지나갔다고 한다.
통신사(通信使)란 말
그대로 서로 신의를 통해 교류한다는 뜻을 가진 사절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근세에 들어 다시 배반했다.

 

우리에게 일본은 여러 번 배신의 나라였다.


 





 

3월 1일

08:30
오늘은 삼일절이다.그런날에 면암 최익현선생과 관련된 수선사(修善寺,슈젠지)를 찾는 것은 의미
가 깊다.수선사는 백제의 스님이 건너와 창건하였다는 얘기도 있고, 백제의 비구니 스님이 창건
했다는 설도 있다.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한다. 수선사가 중요한 이유는
조선 후기의 학자이며 충신이었던 면암 최익현 선생(1833-1906)이74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06년 의병을 일으켜 항일 운동을 하다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로 유배되었다고 한다.뜻을
굽히지 않고 단식 투쟁을 하다 그해 11월 순국을 하였다. 면암의 주검은 이곳 수선사에서 장례를
치른 뒤 부산으로 운구되었다.

 

최익현 선생의 의병일행은 서울로 압송되어 우리 사법부가 아닌 일제에 의해 재판을 받게 된다.
대마도 감금 3년 그렇게 시작되었고,선생은 조선에서 떠 온 물만 마시면서 단식하다 1907년
1월 1일 한 많은 적지(敵地)에서 숨을 거두었다.1907년 1월 4일 일본 대마도 수선사(修善寺)에서
임병찬이 제문을 읽은 후 이틀후에 부산 초량(草梁)에 닿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많은 유림시민
들은 눈물을 머금고 나와 맞이하였으며 영구(靈柩)를 붙들고 통곡했다.

 

상여가 마련되어 정산(定山) 본가로 운구(運柩)하는 곳에 따라 노제(路祭)로 전송하고 울부짖는
민중들 때문에 하루에 10리 밖에 운구하지 못하였다.영구는 구포(龜浦), 김해(金海), 성주(星州),
공주(公州)를 거쳐 15일만에 정산(定山)에 도착하여 그해 5월(음 4월 초 1일)에 노성 무동산
(魯城 舞童山)에 안장되었다.

 


지금은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 21-1에 위치한다고 한다.







 

09:45
다시 버스를 타고 부산에 가까운 북쪽으로 향한다.중간에 도착한 곳이 만제키万關바시라는 다리다.
그 아래 운하가 있다.이것은 1900년대 일본 해군이 함대의 통로로써 둘로 나위어진 쓰시마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다.만조시 조류의 소용돌이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낸다고 한다.
이곳에 서면 긍정적인 사람은 "번지점프하면 좋겠다"고 하고 부정적인 사람은 "자살하기 좋은
자리"라고 허경희 가이드가 자신의 느낌을 알려준다.

 

대마도는 상上대마와 하下대마로 나뉘어지는데 그 경계선이 이곳이다.사실 대마도는 두섬이다.
쓰시마라는 지명은 그래서 우리말 두 섬에서 온 것이라 해석하는 음운학자도 있다.
두섬→두서마→쓰시마로 음운변천했다는 것이다.좀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말이 일본말에
끼친 영향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두’와 ‘쓰’가 대응하듯 ‘쓰’는 한국말 ‘두’이고, 그 ‘두’는 ‘둘’
이라는 뜻이다. ‘시마’는 우리의 옛말로 ‘셤’이다. ‘셤’은 ‘시엄’이니 ‘시마’로 변할 수 있다.
‘시마’를 ‘島’라고 쓰지마는 ‘志摩’(시마)라고 쓰는 것을 봐도 글자보다는 소리를 취하는
느낌이다.



"두"와 "쓰"가 대응하는 것은 아래 예를 보면 더욱 확실해진다.



〈한국말〉 〈일본말〉



두레박 쓰루베
두루미 쓰루
두루마기 쓰루마키
구두 구쓰

 

각설하고 이곳은 쓰시마해전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러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전쟁이 쓰시마 해전 (일본에서는 일본해 해전으로 부름)이다.
일본육군은 개전이후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일본의 피해도 작지 않았다.

 

봉천전투에서 25만명의 일본 육군중 전사자가 7만에 달하고 있었고, 37만의 러시아 육군 중
9만명을 사살하고 2만여명을 포로로 잡고 있었다.일본 연합함대는 동아시아에 있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황해 해전과 부산해 해전에서 격파해 무력화 시킨 뒤 발트함대와 대결할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발틱함대를 어디서 맞아 싸워야 하는 것이었다.


 

캄란만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는 항로는 3곳으로 쓰시마 해협, 쓰가루 해협, 소야 해협
이었다. 러시아 함대에 비해 세력이 열세인 일본 연합함대는 이중 1곳에 전력를 집중시켜야
했다. 일단 2곳은 거리상 및 기뢰에 의한 방어가 튼튼했기에 도고 헤이하치로는 쓰시마 해협을
통과할거라 예상하고, 한반도 남부해안에 주력함대를 배치하고 경계망을 폈다.

 

침로를 남서로 정한 연합함대와 침로를 북동으로 정한 발틱함대는 반항로(평행과는 다른)
상에 있었다. 14시 3분 양측 함대의 거리가 11,000m까지 접근했다. 거리 8,500m 에 이르자
포술장교가 포격전의 사격준비를 우현으로 할것인지 좌현으로 할것인지 물었다.

 

어느덧 거리 8,000m가 되자, 도고는 오른손을 높이 들어 왼쪽으로 반원을 그리는 모습을
보였고, 선두에 있던 기함 미카사는 크게 좌현으로 돌기 시작했다. 적 앞에서 대반전하는
일명 [정(丁)자전법] 혹은 [도고 턴]의 개시였다.정자전법은 도고가 이순신장군의 학익진
에서 한수 배웠다는 것은 이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러시아 함대는 전함, 순양함의 대부분을 침몰 혹은 나포당해 대부분의 전력을 이 해전에서
잃어버렸다. 일본함대의 피해는 경미했다. 대함대끼리의 해전임에도 불구하고 피해의 차가
이렇게 크게 난것은 별로 없었기에 해전사 역사상 매우 보기 드문 승리였다. 이 승리는 세계
를 놀라게 했고,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할 시 일본에게 매우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그런 결과로 조선은 일본에게 먹히게 된 것이다.이곳을 지나면서 마음이 너무
착찹하였다.


 

10:35~11:04
이제 버스는 하대마를 지나 상대마로 접어든다.에보시타케전망대에 올라 멀리 시라다케와
쓰시마의 하롱베이라고 하는 아소만淺茅灣을 굽어본다.조망을 마치고 바로 아래 와타즈미 신사
였다.와타즈미 신사는 바다의 신을 모신 해궁으로 용궁전설이 남아있다.

 

와타즈미 신사 에서 히코호호데미노 미코토와 더불어 모시고 있는 토요타마 히메 즉 풍옥공주
이다.
손에 든 옥에 대해서는 나중에 일본의 건국신화 고서기에 나오는 초대천황 진무텐노의
할머니다.

 

빛의 신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증손자인 야마사치히코와 해신의 딸 토요타마공주의 러브
스토리가 전해져오는 타마노이...해궁이라고 불리는 와타즈미 신사의 도리이 답게 석조 도리이
(신사의 입구. 우리나라로 치면 절의 입구인 일주문에 해당)가 보인다. 와타즈미 신사의 바다쪽
으로 난 도리이는 총 5개다.


설화의 내용은 이렇다.

 

빛의 신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의 손자 '니니기노 미코토'에게는 '우미노사치(바다에서 나는것)
히코'와 '야마노사치(산에서 나는것)히코'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그 이름대로 우미노사치
히코는 바다에서 낚시를 하고 야마노사치히코는 산에서 사냥을 하는 이었다.


하루는 야마노사치히코가 바다에서 낚시를 한번 해보고 싶어서 형인 우미노사치히코한테
낚시바늘을 빌려서 바다에 나갔다가 그만 소중한 낚시바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불같이 화를 내는 형을 피해서 해변가로 나온 야마노사치히코가 낙심을 하고 있는데 '시오츠라'
라는 한 신이 다가와서 이유를 물어보고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신이 가르쳐준대로 야마노사치히코는 해궁(海宮)문옆에 있는 우물옆의 나무위에 올라가

있다가 물을 길러온 여인의 물병에 보석을 넣었다.그 여인이 해신의 딸인 토요타마공주로
둘은 결혼하여 용궁에서 3년을 살았는데 어느날 야마노사치히코는 잃어버렸던 낚시바늘이
생각나 해신에게 도움을 청하여 바늘을 찾아서 형에게로 갔고, 토요타마공주는 뭍으로 올라와
아들을 낳았는데 바로 그곳이 와타즈미 신사가 있는 자리라고 한다.

 



야마노사치히코가 아내의 출산장면(뱀의 형상이었다고 함.와타즈미 신사의 신목 뿌리가 뱀의
모습인데 이것도 하나의 설화임)을 봐서는 안된다고 한 금기를 어겨서 공주는 아이를
버려두고 용궁으로 돌아가 버렸다.야마노사치히코와 토요타마공주의 아들 '우가야후기야에즈'는
다시 이모인 '타마요리'공주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데 그것이 바로 일본 초대천황인 진무
천황이다.

 



결국, 거제도보다 쪼끔 더 크고 제주도 보다 쪼끔 더 작은 이 대마도라는 작은 섬이 일본
건국신화의 중심지인 것이다.또한 눈여겨볼 점이 와타즈미 신사가 위치한 아소만이 일본 본토
쪽이 아닌 한반도쪽의 바다에 접하고 있으며, 와타즈미 신사는 진무천황이 '가라쿠니다케'를
그리워하며 지은 곳이라는 점이다.('가라'는 '가야', '쿠니'는 '나라')='가락국'이라고 불리운
가야국을 뜻하며, '다케'는 '산'을 뜻한다.

 


즉 천황이 가야국의 산천을 그리워 한다는 뜻이다.이것은 바로 한반도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이 되었다는 설을 뒷받침해주는것은 아닌가하는 관점에서 우리에게도 중요한 점이다.
이곳엔 토요타마의 무덤이 있는데 그 분위기는 흡사 우리나라의 성황당과 흡사하여 눈길을 끈다.





 



 

 

12:34~13:34
신성한 토요타마(豊玉)를 지나면서 지루하게 차는 달린다.차고 작고,음식도 적게 주고
도로도 좁은 곳이 일본이다.한숨 자고 일어나서 도착한 곳은 한국전망대이다.


 

대마도의 최복단에 위치한 카미쯔시마는 한국까지 49.5km의 거리로 날씨가 좋은 날은 부산시의
거리까지 볼 수 있는 그야말로 [국경의 섬]임을 실감케 한다. 지리적,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에
있는 한국의 이미지를 담아 만든 팔각정 건축물로 서울 탑골공원에 있는 정자를 모델로 하였고,
한국산 자재 구입 및 전문가 초빙 등 철저히 한국풍을 고집하였다고 한다.

 

오늘은 박무로 인하여 부산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휴대폰으로 로밍없이 SMS를 확인하고 부산으로
전화하여 통화를 할 수 있었다.이후 일본의 아름다운 해수욕장 100선에 선정된 미우다해수욕장에
들러 마지막 쓰시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후 히타카츠항에서 출발하여 부산으로 돌아왔다.

 

1박2일의 대마도 산행과 여행은 마치 500년을 오가며 살다가는 느낌이라고 말한 애서가산악회의
조경훈 시인의 말에 동감하게 되었다.


 



 



 



 

 

창의시(信義誇)

-최익현(崔益鉉 )

皓首奮較熱(호수투견묘) 백발로 밭이랑에서 분발하는 것은
草野願忠心(초야원충심) 초야의 충심을 바랐음이라.

亂諒人皆討(난적인개토) 난적은 누구나 쳐야 하니,
何須問古今(하수문고금) 고금을 물어서 무엇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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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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