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산▲ 세계는 한송이 꽃.너와내가둘이아니요.


- 언제 : 2009.4.25 (토) 08:00~20:00
- 얼마나: 2009.4.25 12:30~14:30
- 날 씨 : 흐림
- 몇 명: 홀로

- 어떻게 : 자가용 이용

▷수덕사 주차장-수덕사-소림초당-미륵석상-만공탑-정혜사-정상-한산 소곡주

- 개인산행횟수ː 2009-14[w산행기록-227/T717]
- 테마: 답사산행
- 산높이:덕숭산495.2M
- 호감도ː★★★★

 


수덕사는 한번은 가보고 싶은 절집이었지만 여러 가지 책을 읽으면서 별로 볼 것이 없다는 폄하성 글에 굴복하여 그 동안 가 보질 않았다.그 옛날의 정취는 모두 사라지고 중국 무협영화에서나 봄직한 경망스러운 돈자랑의 흔적만 있다는 것이었으며,내가 사는 부산에서 그기까지는 왕복 740KM를 달려야 하는 장거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만공스님의 흔적도 궁금하고 국보인 대웅전만이라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미치어 그기로 가보기로 하였다.이왕 가는 김에 수덕사 뒷산인 덕숭산 산행도 해보고 오는 길에 1,500년 역사의 한국 전통주의 최초의 술(우리땅의 처음술)이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산 소곡주를만드는사업장을둘러보기로계획을잡았다.

 

수덕사가 있는 인근의 내포땅은 비산비야의 구릉지성으로 온화한 느낌의 땅이다.그렇지만 이곳 출신의 사람들은 제 명을 다하지 못할 정도로 기가 세고 의를 다한 분들이다.최영,성삼문,이순신,김정희,최익현,김대건,윤봉길,김좌진,김옥균,심훈,박헌영,한용운,그리고 고암 이응로...

 

그리고 수덕사하면 고승 송만공스님과 "청춘을 불사르고"의 시인 김일엽 스님,그리고 송춘희의 노래 "수덕사의 여승"이 떠오른다.

 

영화 "시대정신Zeitgeist"을 보면 티벳 불교의 전파자 트룽파(Chögyam Trungpa)의 연설로 시작하는데 연설의 핵심은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현재다"라는 메시지가 있다.그 내용을 보면

 

『실제로 중요한 건 "지금 현재"입니다. 현재는 명확하게 "현재"입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유용한 것을 즉각적으로 경험하려 노력합니다. 우리가 현재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과거에 존재했었다는 생각에 아무런 요점도 없습니다. 지금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비주의적인 것이 없이, 단지 "현재"는 너무나 정직하게도 단순합니다. 그리고 그 현재성에서, 어쨌든, 이해의 분별은 현실과 당신이 끊임없이 하나씩 상호 작용하고 있다는 것에서 항상 발생합니다. 우리는 실제로 항상 엄청난 정확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재"에 협박을 당하게 되고 그러므로 과거 또는 미래로 비약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공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요점은  "현재를 잘 파악하라는 것"이다.

 

『인생은 과거를 부를 수도 없고, 미래를 보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재가 현재이기 때문에 현재를 완전히 파악하게 되어야 과거, 현재, 미래의 생활을 일단화(一單化)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은 과거에 사는 것도 아니요, 미래에 사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현재에만 살고 있는데 현재란 잠시도 머무름이 없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동하는 순간이니, 그 순간에 느끼는 불안정한 삶을 어찌 실(實)답다 할 수 있겠습니까. 과거와 현재가 합치된 현실이 있나니 현재는 과거의 후신(後身)이요, 미래의 전신(前身)으로 과거, 현재, 미래가 하나입니다.』

 

두분의 말씀이 비슷한 것 같지만 완전히 다른 말이다.트룽파의 "현재"가 전부가 맞다면 나는 오늘 이곳 수덕사에 온 것은 상당히 비효율적인 방문일 것이고 만공스님의 말대로 "현실을 잘 파악하여 현실에 자족하고 다시 얻을 도리를 찾는 것"이 맞다면 나의 답사길은 헛걸음은 아닌 것이다.

 

 

부산에서 출발하여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비가 오기도 하고 강풍이 불기도 한다.
진달래 피는 시절이건만 하룻밤새 날씨는 싸늘해졌고 황사마저 기승을 부린다.
12시가 다 되어 수덕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다행히 비는 그쳤다.우선 식당에서
산채비빔밥으로 허기를 채우고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한다.

 

일주문을 만드는 공사 중 인데 그곳을 비켜 나아가니 부도전을 조성하는 곳으로
보이는 터가 보인다.여러가지 화려한 석물들이 보이는데 아직 미완성이다.

트롯풍의 음악을 틀어놓고 두발이 잘린 상태로 엎드려 구걸하는 걸인의 모습이 짠하다.
신도증이 있어서 조계종 사찰은 그냥 통과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 걸인에게 입장료 만큼
보시하고 수덕사로 향하는데 고암 이응로 화백과 관련된 수덕여관이 보인다.

이곳엔 이응로 화백의 암각화가 두점있다.이응로 화백은 김규진 문하에서 그림을 시작해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서 점차 추상적인 작업으로 옮겨갔고, 후기에는 상형문자를
이용한 〈문자추상〉과 인간을 단순한 기호로 표현한 〈군상〉 작품을 제작했다.



그는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좌파로 몰려 58년 파리로 피신했다가 체포되어 2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옥중에서도 몰래 얻은 종이와 밥풀을 모아
작업을 계속해 예술에 대한 열정을 드러냈다.

 

한국미술계의 거장 고암 이응로(1904~1989) 화백이 나이 마흔살에 이 곳 수덕사에 터를
잡아 둥지를 튼 수덕여관. 이 화백은 1944년 수덕여관을 열고 이후 15년간 머물면서 수덕사
일대 자연과 풍광을 화폭에 담았다.

 

암각화 주변에는 친절한 안내문이 걸렸다.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후 지친 몸과 마음을 다독이며 이 곳 수덕여관에 쉬면서
제작할 때 작고한 박귀희 여사께서 ‘여보, 너무나 고생하시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쉬지 않고
왜 그 어려운 돌에 글자를 새긴다고 그러세요? 좀 쉬세요’라고 하자 고암 선생께서
‘당신은 모를꺼야. 삼라만상의 성쇠(盛衰)를 만들고 있네’.” 암각화 주변을 서성이다 보면
쉼없이 성하고 쇠하는 세상살이를 읊조렸던 고암의 마음이 새삼 와닿는다.



지난 1996년 충남도지정문화재기념물 제 103호로 지정된 ‘수덕여관’은 고암 선생의
부인 박귀희 여사가 2002년 세상을 떠나면서 방치돼오다 지난해 수덕사가 인수해서
1년만에 복원됐다.

동백림 사건(東伯林事件) 또는 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동백림’은 당시 동독의 수도였던 동베를린을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가 포함되어 있었으며,
천상병시인도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간첩으로 지명된 교민과 유학생은 서독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강제로 대한민국으로 송환
되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당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정부와 외교문제를 빚기도 했다.

 

1967년 12월 3일 선고 공판에서 관련자 중 34명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대법원 최종심에서는 간첩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없었다.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는데, 유럽에서 활동하는 음악인들과
독일연방공화국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항의하여 복역 2년만에 석방되었다.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2006년 1월 26일에,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접촉과 동조
행위를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하여 사건의 외연과 범죄사실을 확대·과장했다고
밝히고, 사건 조사 과정에서의 불법 연행과 가혹행위 등에 대해 사과할 것을 정부에 권고했다.

수덕여관을 나와 수덕사로 향한다.내가 상상 것보다도 의리의리하다.아마도 수덕사의 여승이라는 노랫말에
담겨있는 애잔함이 내 머리속에 있었다면 이곳은 애잔함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다.실로 위풍당당한 절집의
위세에 주눅이 들 정도이다.그런데 그곳에 있는 대웅전의 모습은 이곳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담하다.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된 목조건물로 국보 제49호이다.

 

현재의 수덕사 사세와 비교하면 작지만 간결한 것의 힘과 멋은 수덕사의 모든 구조물과 비교해도 주눅이
들지 않는다.이 건물이 701년이 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찬 모습이다.

 

고려시대 맞배지붕집의 장중하고 엄숙한 멋에 오랜만에 보는 명품을 보는 느낌이다.측면의 둥근기둥과
각이 진 들보를 노출시키면서 절묘한 면 분할로 집의 모양새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대웅전을 관람하고 등로를 찾아 바깥으로 향하니 바위에 동전을 붙이는 모습이 보이고
담쪽으로 나오니 덕숭산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계곡을 따라 정성스럽게 놓여진 돌계단을 오르니 소림초당이 보인다.소림초당에서
아랫쪽으로 풍광을 감상하고 싶었으나 "정진"중으로 "출입금지" 기왓장 한 장이
있어서 먼발치에서 그냥 바라만 보고 다시 등로를 따라 오른다.

 

곧 관음상이 보이는데 일제시대에 만공스님이 새운 미륵석상이다.지도에는 관음상
으로 표기되어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미륵석상의 모습이다.
발 아래 소림초당의 지붕이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면 만공(萬空)스님의 승탑이 있다.앉은 위치가 참 좋다.네모진 탑신을 여럿
붙이고 그 위에 공모양의 상륜부가 얹혀 있는 이형승탑(異形僧塔)으로 현대적 감각이
돋보인다.뒷면을 돌아보니 천번의 생각은 한번의 실천보다 못하다(千思不如一行)는 글귀가
보이고 세계일화라는 글귀도 보인다.

세계일화의 원전은 이렇다.

세계일화(世界一花) 만공 월면(1871-1946) 대선사

 

세계는 한 송이 꽃.
너와 내가 둘이 아니요,
산천초목이 둘이 아니요,
이 나라 저 나라가 둘이 아니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

어리석은 자들은
온 세상이 한 송이 꽃인 줄을 모르고 있어.
그래서 나와 너를 구분하고,
내 것과 네 것을 분별하고,
적과 동지를 구별하고,
다투고 빼앗고, 죽이고 있다.

허나 지혜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아라.
흙이 있어야 풀이 있고,
풀이 있어야 짐승이 있고,
네가 있어야 내가 있고,
내가 있어야 네가 있는 법.

남편이 있어야 아내가 있고,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고,
부모가 있어야 자식이 있고,
자식이 있어야 부모가 있는 법.

남편이 편해야 아내가 편하고,
아내가 편해야 남편이 편한 법.
남편과 아내도 한 송이 꽃이요,
부모와 자식도 한 송이 꽃이요,
이웃과 이웃도 한 송이 꽃이요,
나라와 나라도 한 송이 꽃이거늘,

이 세상 모든 것이 한 송이 꽃이라는
이 생각을 바로 지니면 세상은 편한 것이요,
세상은 한 송이 꽃이 아니라고
그릇되게 생각하면
세상은 늘 시비하고 다투고 피 흘리고
빼앗고 죽이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니라.

 

 

그래서 세계일화(世界一花)의 참 뜻을 펴려면
지렁이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참새 한 마리도 부처로 보고,
심지어 저 미웠던 원수들마저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요,
다른 교를 믿는 사람들도 부처로 봐야 할 것이니,
그리하면 세상 모두가 편안할 것이니라.

 

그리고 "백초시불모(百草是弗母)"라는 글도 보인다.
이는 "백가지 풀이 모두 부처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어느 것 하나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가 아니라 모두가 다 의미가 있다는 의미이니
결국은 분별을 하지 말라는 메시지다.

 

부정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처음에는 쉽지만갈수록어렵고,
긍정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처음에는 어렵지만 갈 수록 쉽다고 한다.
"백초시불모"는 대긍정으로 들어가는 노선이다.

 

우리는 살면서 흑백논리에 사로잡혀서 산다.나만해도 상당히 그런 편이다.
그러나 하나씩 배우며 깨우치고 사는 것이 세상사이니
공부하는 자세는 유지해야한다.



 



 

바로 곁에 정혜사가 있다.불유라는 글자가 보고 싶었지만 절집이 너무나 조용해서 도량 가장자리
끝에서 경관만 조망한다.너무나 훌륭한 조망터이다.수덕사가 보이고 비산비야를 따라 길이
보인다.



 



 

 

마사토의 조금 미끄러운 산길을 따라 오르니 제법 큰 돌들이 삐죽이 머리를 내민 정상이
나타난다.다시 정혜사로 내려와서 소림초당을 지나 환희대를 둘러보고 수덕사를 떠났다.

 



 



 



 

 

수덕사가 있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을 출발하여 한산 소곡주가 있는 "충남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66-9" 주소를 네비게이션에 입력 한 후 운행하였다.한산모시 박물관 맞은편에
한산 소곡주 판매장이 있어서 대병으로 2병을 구입한 후 부산으로 돌아왔다.

 

술(酒)의 옛글자는 유(酉/닭, 별, 서쪽, 익을 유)자이다.유(酉)자는 본래 밑이 뾰족한 항아리
(술의 침전물을 모으기 편리하다)에서 유래한 반면, '술' 의 고유한 우리말은 '수블/수불'
이었습니다. 수블>수울>수을>술 로 변천하였을 것이다.옛사람에게는 물이 난데 없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신기하여 물에 불이 붙는다는 뜻으로 '수불'이라 하지 않았을까 생각
된다.백제에서 일본으로 청주 제조기법을 알려준 것으로 문헌에 나와있다.

 

한산 소곡주는 1,500년 역사의 우리땅의 처음술이다.우리나라 전통술은 150가지 정도가
알려져있는데 그 중 시판되는 제품은 50여종이다.우리나라 음식엔 우리술이 좋건만 어느
순간 식습관이 서구화되고 술도 와인이나 양주가 최고인 줄 아는데 1,500년된 우리 전통술
이 외면되는 지금의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술은 강하다.
왕은 더 강하다.
여자는 한층 더 강하다.
그러나 진리는 이보다도 한층 더 강하다.

-마르틴 루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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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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