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III)묘당에 세 정승이 있다하지마라,나라의 안위는 한 승려에 달렸노라!

- 언제 : 2012.5.13(일) 05:30~14:00
- 얼마나: 2012.5.13 16:15~12:30
- 날 씨 : 약간 흐림
- 몇 명: 10여명
- 어떻게 : 자가SUV 이용(사진클럽 프리즘 출사동행)
▷(프리즘 동행)위양못-(이후 홀로)무봉사 석조여래좌상-변계량비각-모선정-사명당 생가지-무안리 향나무

 

 

올해 세 번째 간 위양못은 약간 흐린 날씨에 물결은 옅은 바람에 일렁이었다. 이팝나무를 비롯한 낙화된 꽃잎이 물위를 유영하며 물빛은 탁했지만, 짙은 신록은 눈을 시원하게 만들며 아침부터 부산했던 시간들을 보상해주었다.2시간여에 걸친 충분한 출사시간 이후 함께 아침식사를한 후각자의일정대로흩어졌다.

난 이미 두 번의 밀양의 유적지 탐방을 통하여 제법 유명한 곳은가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자료를 뒤져보니 아직 남아있는 곳이 제법 많음을 알게 되었다.그래서 이왕 밀양에 온 이상 그 중 일부 장소를 추가탐방하고자 다시 밀양을 배회하였다.

 

 

위양못(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위양리 294번지)

 

물의 반영이 좋았으나 계속 일렁이는 물결 때문에 깨끗한 반영을 얻지는 못하였다.
화려한 이팝나무는 좋았으나 그 꽃잎들로 인하여 물빛은 탁하였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는 잃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위양못을 한바퀴 돌며 산책을 했다.보리밭에 엉겅퀴가 꽃을 피웠고,
위양못 가장자리의 왕버들은 자연의 프레임을 만들기도 하고 가로막기도 한다.

 

깨끗한 물빛 반영을 잡으려는 슈터의 몸동작은 스나이퍼를닮았다.
화각에서 허물어진 정자 지붕을 피하고, 정자의 헌 담요을 비롯한 쓰레기는
나뭇잎으로 가리니 사진은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찍는 사기다.

 

내이리의 "신라해장국"집으로 가서 단체로 식사를 한 후 각자의 일정대로 흩어졌다.
이후 홀로 유적지를 탐방하였다.

 

 

무봉사 석조여래좌상(밀양시 내일동 영남루길 16-11 / 영남루에 붙어있다.)

 

영남루를 지나 무봉사 돌계단을 올라가니시원한바람이불어와이마의땀을식혀준다.
무봉사의 석조여래좌상은 원래 부근의 영남사(嶺南寺) 터에 있던 것을 옮겼다고 한다.


 

스님의 천수경 소리가 낭낭하게 새어나오는 문 안쪽으로 항마촉지인,결과부좌,굵은 나발,
얕은 육계가 보이고 가늘게 내리뜬 눈,우뚝한 코,꼭 다문 잎,엷은 미소는
불상의 격이 남다르다.


 

통일신라 9세기경 작품이라고 한다.

 


 

변계량 비각(경남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춘정 변계량의 행적을 기록한 유허비로 이곳이 변계량의 출생지라고 한다.
변계량비각이라고 되어있지만 비각자체가 건축사적으로 유명한 건물은 아니니
변계량 유허비로 명명하는 것이 이치적으로 옳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비석을 보니 밀양변씨삼(密陽卞氏三)이 보인다.비문 뒤쪽으로 글씨가 있을텐데,
비각의 문을 잠궈놓아 안으로 들어갈수가 없어서 집에 와서 자료를 확인해보니
密陽卞氏三賢遺墟碑 (밀양변씨삼현유허비)다.



비석 하나를 세워 변계량의 아버지 검교 변옥란공과
형님인 춘당 변중량공의 행적을 함께 실은 것이다.

 

변계량은 학문의 최고벼슬이라는 대제학을 20년간 한 최고의 지식인이다.
10여년간 대제학을 지내는 동안 ,외교문서를 거의 도맡아 지어 명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청구영언에 전하는 시조 2수는 "안민가"와 "동심가"이다.

 

형의 호 춘당과 변계량의 호 춘정은 모두 "봄날의 집"이다.지난 겨울의 상징인
고려를 묻고,서둘러 봄의 세상에 살고 싶다는 마음이다.


 

두 형제는 모두 정몽주의 제자였다.스승이 무참히 맞아죽는 것을 받아들였을 형제
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해 좋다하고 남 싫은 일 하지말며
남이 한다하고 의(義) 아녀든 좇지마라
우리는 천성을 지키어 생긴대로 하리라"

 

세상의 모든일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태도가 시조에 묻어난다.

 

자신이 지어놓고 감탄을 했던 시 한편 때문에 나중에 김구경과 시비가 붙는다.


 

시비가 붙은 변계량의 시는 이렇다.

 

虛白連天江渚曉
暗黃浮地柳堤春
텅빈 흰빛이 하늘에 이어지니 강가에 새벽이 오고
어둑한 노란빛이 땅에 솟아나니 버들언덕에 봄이 오는구나.

 

김구경의 시는 이렇다.


 

驛亭揖酒山當戶
江郡吟詩雨滿船
역마 휴게소에서 술잔 잡으니 산이 집앞에 다가와 있고
강고을에서 시를 읊으니 비가 배 위에 가득하네

 

변계량의 시가 다소 다큐적인 느낌이라면
김구경의 시는 스냅사진 처럼 경쾌하다.


 

나는내가무거운성격이라서김구경의 시가 더 마음에 든다.

 


 

모선정(경남 밀양시 초동면 신호리 220)

 

변계량비각 근처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나온다.인륜의 근본은 효이다.
벼슬보다 효행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장소이다.

 

모선정은 고려말의 충절신 송은 박익선생과 둘째 아들 인당 박소,증손 모선재
박수견선생의 삼현을 기리는 곳이다.

 

박익의 호는 송은松隱,즉 "소나무 숲에 숨다"이다.


 

태조7년 송은 박익은 아들들을 불러 유언하기를 "先天後天父子異時"선천후천부자이시"
라 하며 "나는 고려의 신하로 죽지만,너희들은 새로운 왕에 충성하라"고 하였다.

 

벼슬보다는 효행이요.관직보다는 청렴을 선택한 정신이 이곳 모선정을 흐른다.

 

박익의 묘는 예전에 한번 다녀온 기억이 있다.
사각형으로 만들어져 고려의 무덤형식을 따르고 있는데 영남에서 고려의 무덤을
본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무덤 안에벽화가 나왔었다.

 


 

사명대사 생가지(경남 밀양시 무안면 고라리 399,422번지)

 

사명대사의 생가지,즉 유지다.호는 사명당 혹은 송운이다.그래서 "송운대사구택"
이라고 적혀있다.불두화와 모란이 함박꽃처럼 피어있었다.

 

생가지 옆 사명대사 기념관에 가면 풍수지리적으로 참 묘한 자리에 위치에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백두 대간이 내려오다.소백과 태백으로 나뉘고 그 중간에 놓인 절묘한
자리다.

 

사명대사의 생가터는 정확하지 않으나 399번지 혹은 422번지로 추정하는데
현재 학계에서는 399번지가 더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사명대사기념관 정문 유리문 뒤로 사명대사의 동상이 보이고 그 뒤로 산봉우리가
일자처럼 평탄하게 생긴 산형이 보인다.


 

풍수에서는이를일자문성(一字文星)이라고 한다.이런 산형을 토형산(土形山)이고
토(土, 흙)는 중앙이다.오행으로 토의 색상은 황색으로 황제와 동급이 된다.
풍수에서 일자문성을 귀히 여기는 이유다.

 

기념관에 보이는 대사의 글씨는 정말 달필이다.한참을 들여다보게 된다.
전설로 남을 정도의 탁월한 외교적 수완으로 1604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만나
강화를 맺고 조선인 포로 3,500명을 인솔하여 귀국한다.

 

"묘당에 세 정승이 있다하지마라,나라의 안위는 한 승려에 달렸노라!"는 평가는
얼마나 그 시기에 큰 일을 해냈는지 알 수 있다.

 

사명대사의 우리의 삶과 정신을 담금질한다.

 

"깍아지른 절벽에 발붙일 곳 없어도 목숨을 놓고 몸을 잊고 의심없이 나가라
다시 칼날 향해서 한번 몸을 뒤쳐야만 비로소 공겁 이전의 일 알리라."

 

먼저 정신을 담금질 받을 사람이 다름아닌 서울에 있는 몇몇 중들이다.


 

호텔에서 술마시고 담배피며 도박한 썩은 조계종 중들의 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밀양 무안리 향나무(경남 밀양시 무안면 무안리 903-2)

 

네비게이션을 따라가보니 표충비각이 있는 곳이다.예전에 본 나무인데
또 한번 더 보게되었다.경남기념물 제119호로 1742년 표충비각을 건립한 후 기념하여
심은 향나무다.수령 300년되었다.볼수록 신기하게 생겼다.
나무 너머로 표충비각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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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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