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왜구의 침략을 막으려는 의지가 담긴 흔적들

 

- 언제 : 2021.3.6(토) 
- 날 씨 : 대체로 구름
- 몇 명: 홀로

▷ 답사일정

부산→봉림사지3층석탑(상북초교)→외동 석불좌상→삼정자동 마애불→성주사→부산

 

 

창원은 37년간의 직장 생활중 마지막 1년을 보낸 곳입니다.부산과 창원은 거리로는 불과 40km에 불과하지만 직장 분위기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에 간 느낌이었습니다.부산은 6.25 한국전쟁 당시 임시 수도를 했고 전국의 피난민이 집결했고 항구를 끼고 있다보니 뭔가 개방적인 분위기라면 창원은 계획도시로 국가산단이 있다보니 상당히 빈틈이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직장 생활 37년 중 초기 1년은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여 힘들었지만 마지막 1년도 힘든 시기였습니다.새벽 5시에 일어나 차를 타고 출근하여 어둑한 시간에 퇴근하여 잠만 자고 다시 출근하는 생활이 1여년 지속되다보니 그다지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창원은 바다를 끼고 있지만 산으로 둘러 쌓여 내륙도시 느낌이 납니다.부산과 인접해있지만 겨울에 부산보다 창원이 1~2도 정도는 기온이 낮습니다.지금의 창원 모습을 보면 계획도시로 새로 생긴 도시처럼 보이지만 이곳의 역사는 신석기 시대 이후부터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몇군데 둘러보면 옛 것들이 산재해 있을 것으로 보고 둘러봅니다.

 

 

 

 

 

 

▷창원 봉림사지 3층석탑
   경남 창원시 의창구 지귀로60번길 13-13 상북초등학교

 

통일신라 석탑양식을 계승한 고려초기 3층석탑인데,
창원시 의창구 부쪽 봉림(鳳林)사지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부산으로 팔려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1960년 지금의 상북초등학교 문 안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부산과 창원  모두 일본과 가까워서 임진왜란,일제강점기와 
관련이 깊습니다.


탑은 깨지고 보수한 흔적이 뚜렷합니다.
석탑 뒤 목련 나무에 봉황 대신 까치집이 보입니다.

 

  

 

 

 

▷창원 외동 석불좌상
   창원시 성산구 외동 601번지

 

 

그리 크지 않은 당도산의 법청사라는 절이 있고 석불좌상이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절집이 없어질 예정인지 모르겠지만 
항의 플랭카드가 보입니다. 

 

통일신라 말기 고려초기 조성되었다고 하는데
엉덩이를 감 싼 좌복(座服)이 조각되어 있는 것은 특이합니다.


 

 

 

귀는 붙인 것으로 보이고 눈썹은 갈매기 형상이고 얼굴이 두툼하며
전체적으로 후덕하고 인자한 모습입니다.

 

 

 

상대석과 하대석은 연꽃문양이 두겹으로 데칼 코마니처럼 새겨져 있고 
중대석은 여의두문으로 보입니다.

 

 

 

 

▷창원삼정자동마애불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 삼정자동 48-2

 

 

동네 이름이 삼정자동인데 옛날에 정자가 셋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정자나무가 셋 있었다고 합니다.

벧엘교회 옆 공터에 주차하고 우측엔 아파트를 두고
포장된 산복도로를 걸으니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데크시설이 나오고
먼지를 터는 에어건이 보입니다.

여기서 데크 계단을 약간 내려가면 좌측 계곡으로 연결되는 길이 나옵니다.

 

 

 

아쉽게도 얼굴 부문은 훼손되었습니다.
이 바위 이름은 장군바위입니다.

 

 

또한 이 마애불이 새겨진 장군바위에는 전설이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왜구들이 노략질을 일삼던 때에 이곳의 한 농가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기를 순산한 산모는 억새잎으로 탯줄을 잘랐고 그 이후로도 아기는 무럭무럭 자랐

 다. 아이가 10살이 되던 해에 아이는 어머니에게 나라를 구할 장군이 되겠다는 뜻을

 밝힌 후 콩 한 되와 좁쌀 한 되를 구해 달라고 해서는 집을 떠나 <아들바위> 속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떠나면서 "누구에게도 절대 자신의 탯줄을 억새 잎으로 잘랐다는

 말을 하지 말아 달라" 고 어머니에게 신신당부하였다.

 

 시간이 지난 후, 이곳을 노략질하던 왜장은 이곳에서 장차 장군이 될 아이가 태어났

 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아이의 어머니를 붙잡아 고문하였다. 모진 고문 끝에 "아이의

 탯줄을 억새 잎으로 잘랐다"는 말을 그 아이의 어머니는 실토하고 말았다.

 

 이 말을 들은 왜장은 아이가 들어간 <아들바위>를 억새 잎으로 내리쳤는데 바위가

 두동강났다. 그 바위 안에는 대장군이 된 아이가 있었고 주변에는 아이가 가져간 콩

 과 좁쌀들이 장수와 병졸들이 되어 막 바위를 깨고 나오려던 참이었다. 이를 본 왜

 장은 서둘러 대장군이 된 아이의 목을 베어 버렸다. 그러자 장수와 병졸들도 순식간

 에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

 

장군바위를 통해서 왜구를 막으려는 염원이 담긴 전설입니다.


부처님이 바라보는 방향은 눈맛이 시원합니다.

 

 

 

아래를 보니 여기가 계곡이라는 것을 알겠습니다.
물확에 고기 2마리가 물에 하늘이 비치어 하늘을 유영하고 있습니다.

 

 

 

맨 아래 대좌가 보이는데 3개의 기둥이 양각되어 있어서 
뭔가 공중 부양 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 위로 군의 자락이 커튼처럼 흘러 내리는데
흡사 연꽃을 거꾸로 한 모습 같기도 합니다.

 

수인은 석굴암 처럼 항마촉지인입니다.
가슴 배 부분은 돌이 일부 떨어져 나간 것처럼 보이지만
허리띠 같은 것이 돋을새김으로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광배는 흐릿하게 선으로 새겨져 있지만 전반적인 돋을 새김 때문에 
입체감이 강하게 느껴집니다.

 

 

계곡이다 보니 습해서 나무에 이끼가 가득합니다.

 

 

 

▷창원 성주사
   경남 창원시 성산구 곰절길 191

 

 

연못가에 한가로이 왜가리 새 한마리가 움직이지 않고 계속 서 있습니다. 

 

 

 

 

통일신라 흥덕왕 10년 무염국사가 창건했는데 빛바랜 대웅전 앞에 3층석탑이 보입니다.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 위로 가장 맨 위의 보주는 원래의 것이 아닙니다.
전반적으로 소박한 모습입니다.

 

 

 

꽃창살 아래 귀면이 보입니다.

 

 

 

 

들어 올때 길 이름이 곰절길이라고 되어 있어서 성주사는 곰에 얽힌 전설이 있을 것 같았는데 
대웅전 우측 벽면 벽화에도 곰이 보입니다.

 

성주라는 의미는 성인이 거주하고 있는 의미인데 여기서 성인은 신라 흥덕왕 시기 무염국사입니다.
임진왜란 때 성주사가 소실되어 조선 숙종과 순조를 거치며 재건되었는데 쌓아둔 목재를 곰들이 나타나 하룻밤 사이에 지금의 성주사 자리로 올겨 놓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곰절이 되었고 여기 저기 곰 조각과 형상이 보입니다.  

 

 

 

삼성각 앞에 키 큰 소나무와 단단한 석계가 절집의 풍경을 만듭니다.

 

 

바위에 공덕비가 새겨져 있습니다.

 

 

부도밭입니다.중간에 갓처럼 생긴 부도 앞에 금파당 대선사 비석이 보입니다.
그외 뒷줄에 김유당상사 원혜지비,화봉당 경오대사화덕성 부도가 보이고 
앞쪽에 흰색 종석 형식의 정복덕행이라 씌여있습니다.

 

 

힘들었던 시기도 세월이 지나면
추억이 되고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힘든 은퇴 생활이 되지 않도록
백신 주사를 미리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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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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