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딩후기
#문화유산답사

[동산 김형기 애국지사의 추모비가 있는 김녕김씨 문중 재실 유헌재]

자전거 시험운행에 나섭니다.
자전거 시험운행도 하고 가는 길에 운수사를 지나 유헌재도 가려고
계획을 잡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역시 허브방식은 중앙구동의
센서 스피드 방식보다는 힘이 딸립니다.

우선 확인해야할 것은 산으로 갔을때
어느 정도 나의 체력을 뒷받침 해 줄것 인가가 관건입니다.

평지에서의 우수함은 이미 증명이 된 자전거이기 때문입니다.

자전거 크랭크 쪽의 체인링은 36T 싱글입니다. 
카세트 스프라켓은 이글 12단으로 11~50T입니다.

25A 1000wh로 150km~200Km 운행거리가 가능합니다.
시스템 기어박스 250~500w 모터 시스템입니다.


오르막 업힐구간에서 잠시 사진을 찍기 위해 멈추거나 쉰 이후에
다시 운행하려고 했을때 스로틀이 없어서 힘들었습니다.

윗방향으로 방향을 잡고 페달을 밟을려는 순간 핸들이 홱 우측으로
340도 정도 돌며 넘어졌습니다.

뒷드레일 행어가 파손은 안되었지만 스크래치 흠집이 났고
그립 우측도 찌그러졌으며 안장부분도 약간 흠집이 났습니다.

평지에서는 스로틀이 필요없을지 모르지만
오르막 산길에서는 꼭 필요한 것이 스로틀입니다.
일주일 뒤에 스로틀을 설치해준다고 합니다.

시험운행 구간은 신라대에서 운수사 그리고 유헌재로 길을 잡았습니다.





신라대에서 운수사로 가는 길입니다.
임도를 라이딩하며 가다보면 발 아래 신라대와 낙동강이 보입니다.




굿당을 지나 운수사로 가는 길은 상당한 업힐 구간이 있습니다.
중앙구동방식의 자전거로는 한번에 올라가는데
역시 허브방식으로는 힘들어서 중간에 쉬게 됩니다.
결국 여기서 재출발 할때 넘어졌습니다.

속도를 내어 달리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몸은 다치지 않았고 자전거가 약간의 흠집이 났습니다.

좀 더 적응기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입니다.

운수사에 도착했습니다.하얀 연기가 운무처럼 보입니다.



약수 한잔하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유헌재가 보입니다. 자전거는 밖에 두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동산(東山) 김형기(金炯機)선생의 추모비가 있습니다.



이곳은 김녕 김씨 (金寧金氏)유두(柳頭) 문중 유헌재(柳軒齋)입니다.




3.1운동의 주역 동산 김형기 애국지사 그는 부산 사람입니다. 사상구 사람입니다.

김형기 선생이 경성의전(京城醫專)4학년에 재학중 당시 유일한 학생조직인 재경 유학생회 회장으로 계시면서 1919년 1월 민족대표 33인으 한분이신 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과 함께 협심하여 해외독립운동에 대한 정세와 민족자결주의 사상을 고취 시키면서 만세시위운동에 대한 계획을 재 경성의학 전문학교 대표인 주종선(朱鍾宣)(李公厚)김문벽(金文壁) 등과 같이 수립하셨습니다.

동산 김형기 선생은 낙동강변 유두리(지금의 부산 삼락동) 출생으로 서울 탑골공원에서 일어났던 3.1 독립만세 주동자로 옥고를 치렀고, 병원을 운영하면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했던 인물입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인 동산 김형기 선생'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부산 모라동 어느 곳에 그의 기념비가 있다는 사실조차 생소한 실정이니 찾는 이가 없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손자들이 우연히 독립기념관에서 `김형기'란 이름을 발견한 이야기는 종친회에 알려졌고, 이후 종친회는 독립기념관 전시물인 3.1운동 관련자 기소문이란 사실을 알게됐으며, 정부기록보관소에서 동산 김형기 선생이 피고인 1번으로 형을 선고받은 `판결문'까지 찾아냈으며, 동산 선생은 이 자료 덕택에 지난 90년 비로소 건국유공자 애족장을 받게 됐습니다

동산 김형기 선생은 광복후 이데올로기의 회오리에 휩싸이는 비극을 맞이하게 됩니다. 친일세력이 해방후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민족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매도해 나갔고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그를 북한의 김두봉과 외사촌간이라는 터무니 없는 이유를 붙여 연행, 그후 생사를 알 수 모른다고 유족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함께 연행됐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독립투사 최천택선생이 이후 "빨갱이임을 자백하라고 강요당하던 동산이 잔혹한 고문에 못이겨 끝내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말을 유족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요산 김정한의 소설 수라도가 오버랩됩니다.

동산 김형기 선생의 그동안의 공적은 묻히고 초라한 추모비 하나만 있습니다.
유헌재 앞에 추모비가 있습니다. 항일당시 영주동 병원은 항일거점 역할이었고
벌어들인 돈은 의열단에 보냈습니다.

6·25때 정보원에 끌려가 행불되었고 현재 재평가 작업 중이지만 아직 추모사업은
전무한 상태입니다. 지역에서 관심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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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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