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서산9경과 서산9미를 알면 아름다운 비밀 하나가 열린 것이다.
         [부제:문화교류의 통로,태안반도 서산의 겨울답사]

 - 언제 : 2017.1.7  05:30~ 1.8 22:00(1박2일)
- 얼마나: 2017.1.7  10:45~1.8 16:40
- 날 씨 : 구름 많았으나 대체로 포근한 날씨
- 몇 명: 28명(고적답사회 동행/인솔:최영호 교수님)
- 어떻게 :부산관광버스 탑승


▷ 답사지역 : 부산→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보원사지→보원사(사찰음식 공양 점심) → 개심사→
 해미향교→ 해미읍성→ 간월암(1박)→ 부석사(09:30)→ 송곡서원,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 서산객사→
(진국집 점심)→ 부성사→ 안견기념관→ 정순왕후(영조계비) 생가→ 김기현가옥→ 부산
 

 

 동명이인이 있는가하면 동명이산이 있고 동명이찰이 있다.    
합천,성주의 가야산과 이름이 같은 가야산이 서산에도 있다. 합천 가야산은 1,430m이지만 서산의
가야산은 678m로 충남 예산과 서산에 걸쳐 있다.비산비야의 내포를 생각해보면 체감적으로는 제법
높은 산이다.
   영주에 부석사가 있다면 같은 이름의 부석사가 서산에도 있다.내려오는 전설도 같다.

서산의 가야산과 부석사 모두 모르는 사람도 많지만 내포라는 지형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인상적인 곳이다.

 "자서전의 두께는 나이가 먹을수록 얇아진다.그래야 정상이다.살아갈수록 얘깃거리가 많아지기는
하지만,남에게 책으로 써서 전할만한 가치를 지닌 경험담은 별로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닫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자서전도 이럴진대 역사도 비슷한 면이 있긴하다. 그러나 동명이인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듯이
 동명이산과 동명이찰도 또 다른 그곳의 역사가 흐른다.

   태안반도 서산의 위치는 서울 바로 아래쪽이라서 부산에서 가기에는 제법 멀었다.그기에 고적답사회는
항상 용맹정진에 버금가는 강행군을 한다.그래서 1년에 3번 정도 가는 길이지만 한번 다녀오면 몇 달은
쉬어야 다시 그 고통을 잊고 길을 나서게 된다.오고가는 장거리 여독에 계속 이어지는 걸음걸이가 아닌
토막토막 중첩되는 걸음걸이로 하루 15,000보는 걸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유산 답사를 하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기초가 없는 지붕 같아서 균형감을 상실하게 된다.여행을 다녀오면 사진만 남는
다는 말이 있지만 어쩌면 인류는 오고가는 순환속에 유적과 유물,그리고 역사만 남는지 모른다.
    
그런 연유로 앞으로 나아갈 길은 결국 모두 역사의 흔적으로 남으니 심사숙고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한다.

 

 

 

  부산에서 6시 30분 출발한 버스는 예상보다는 1시간 정도 빠르게 답사객들을 오전 10시 45분에 
내려놓았다.

어죽으로 유명한 용현집을 지나 오랜만에 다시 "백제의 미소"를 보러간다.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마애삼존불길 65-13(용현리 2-10)

 

 

○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瑞山 龍賢里 磨崖如來三尊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가야산(伽耶山)의 협곡에 위치하며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마애삼존불상.
1962년 국보 제84호로 지정. 중국과의 해상교통로인 태안반도와 부여지역으로 연결되는 육로에 조성.
삼존상은 묘법연화경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 수기는 부처가 수행자에게 다음 생에 태어날 때
성불을 이룰 것이라 예언을 내리는 것)인 석가모니불(중앙 : 현재)미륵보살(우측 : 미래)제화갈라보살
(提華褐羅菩薩: 좌측 : 석가모니불이 수행자 시절에 부처가 될 것이라 수기를 준 정광여래의 화신으로
과거를 의미)을 표현한 것으로 백제의 법화사상을 반영.

 

 

 

 옛날엔 백제의 미소처럼 모든 것이 부드러운 곡선의 산길이었겠지만
현대적 기술로 성벽처럼 각을 세운 축대는 약간의 이질감이 든다.

 

 그러나 백제의 미소를 만나게 되는 그 순간은 모든 것을 홀리듯 정신을 잃게 한다.
오랜 세월에 좌측의 과거불 제화갈라보살은 오른쪽 발가락 3개를 잃었지만 수줍은 미소가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하고,우측의 반가사유상 미륵불은 양팔이 모두 떨어져 나갔으나
미소만큼은 천진난만한 어린애의 웃음이다.

 

 중앙의 현세불 석가모니불은 얼굴은 굉장히 굴곡이 뚜렷하고 입술은 도톰하여 상당히 입체적이다.
그래서 보는 방향과 시간대에 따라 미소가 달라져보인다.

 

 옆에서 보면 삼존불은 약간 앞으로 내려 굽어보듯 새겨져 있다.

 

 

 

 

▶ 보원사지와 보원사: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 보원사(普願寺) 터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가야산에 위치한 백제 때의 사원으로 1987년 사적 제316호로 지정.
조선시대에는 강당사(講堂寺)라고도 함. 고원 최치원이 남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는
의상(義湘)을 계승한 화엄십사(華嚴十寺) 가운데 하나로 서술되어 있고, 「법인국사보승탑비
(法印國師寶乘塔碑)」에는 화엄종의 법인국사 탄문(坦文)이 국사(國師)로 책봉되어 이 사원에
머물다가 입적하였다 하여, 통일신라 이후 고려초기까지 화엄종 사원으로 존속.
동국여지승람 권19, 충청도, 서산군, 불우에는 개심사(開心寺)ㆍ문수사(文殊寺)ㆍ보현사(普賢寺)
[모두 상왕산에 있다], 운암사(雲巖寺)[팔봉산에 있다], 보원사(普願寺)[상왕산에 있다],
부석사(浮石寺)[도비산에 있다]라 하여 조선전기까지 존속. 이 절터에서는 백제 및 통일신라 때의
금동여래입상(국립부여박물관 소장), 고려시대의 철불좌상(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나말여초의 석조(石槽 : 보물 제102호), 당간지주(보물 제103호), 5층석탑(보물 제104호),
법인국사보승탑(보물 제105호)과 탑비(보물 제106호) 등이 발굴.

 

 

 

호리병 같은 입구를 지나면 넓은 폐사지가 펼쳐진다.탑부재가 한쪽에 보이고 의례 폐사지가
그렇듯이 몇 개 금강석 같은 유물들이 보인다.

 

 5층석탑은 부분적으로 통일신라탑의 특징이 있는 고려전기의 탑이다.
아래 기단에는 팔부중상이 보인다.

 

 

 금당터 철불이 있었을 것으로 유추되는 좌대 뒤로 목장승 2기가 보이는데 아라메길이 보인다.
저길로 가면 개심사가 나온다고 한다.

 
 

탑과 좌대는 일직선인데 당간지주는 약간 우측에 위치하여
당간지주가 옮겨진것인지도 모른다고 한다.


   

보원사지 법인국사탑

[瑞山普願寺址法印國師塔 ]


은 파괴된 부분도 있지만 대체로 보존상태는 좋은 편이다.
 이렇게 넓은 절집은 정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아야 유지가 가능하지만 조선시대처럼 억불숭유 
정책을 펴는 상황에서는 지원이 끊어져 폐사의 길로 갔을 것으로 본다.

  아무리 커도 독자생존이 가능한 경쟁력이 없다면 성주공괴(成·住·壞·空)의 순환처럼 생멸
변화한한다.


(점심은 보원사 대중공양을 했다.오랫만에 맛있는 사찰음식을 먹었다.)

 

강댕이 미륵불: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원래 고풍 저수지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강댕이는 강당사의 사투리다.

 

 

 

 

▶ 

개심사: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 개심사(開心寺)

서산시 운산면 신창리 상왕산(象王山)에 위치한 사원으로 백제 의자왕 14년(654) 감(慧鑑)이 개원사(開元寺)로
창건. 충정왕 2년(1350) 처능(處能)이 중창하고 개심사라 하였으며, 조선시대 중창 및 중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 현존 대웅전은 성종 15년(1484) 건립되어
1963년 보물 제143호로 지정. 중요 문화재로는 개심사 영산회괘불탱(보물 제1264호), 개심사 목조아미타여래
(보물 제1619호), 개심사 오방오제위도 및 사직사자도(보물 제1765호), 개심사 제석범천도 및 팔금강사위보살도
(보물 제1766호)가 주목되며, 선조 13년(1580) 및 17년에는 도가논변모자리혹론(道家論辨牟子理惑論)과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묘법연화경 등을 개판.

 

  새로 만든 일주문 앞쪽에 큰 느티나무 두그루가 있다.
이 느티나무 두 그루가 실질적인 일주문이다.

 

 

  "상왕산 개심사"라는 예서체의 현판은 근대 명필로 알려진 해강 김규진의 글씨로 안양루에 붙어 있다.

 

 

 

 

  

절집에 들어서니 가장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종무소이다.
휘어진 목재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변화속의 그 균형감은 한참을 들여다보게 만들었다.

 좌측 기둥은 그런대로 곧게 치목을 했지만 우측은 연근같은 곡선을 보여주고
백자 항아리 화분이 있는 아래쪽 목재는 아래로 처져 균형감을 보여주는 한편 
위 나무는 위로 글씨를 치켜 쓴 듯이 활달하게 우측으로 마무리되지만
그 바로 위의 나무가 지긋이 누르듯 내려 앉는다.평온함이 온몸을 감싼다

.



 

명부전으로 가는 모서리는 육감적인 나무 근육에 맞추어 벽면의 마무리 선도
곡선 처리되었다.

 

 

▶ 해미향교:충남 서산시 해미면 해미향교길 2-13

 

 해미향교로 들어가는 느티나무의 도열이 굉장히 인상적이다.
아마도 여름에 온다면 더 푸른 숲으로 그늘을 만들어 낼 것이다.

향교 뒤의 숲도 잘 가꾸어져 있다.

 

 


 

 

 

▶ 

해미읍성: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밖은 석축을 쌓아 돌담처럼 보이지만 안쪽은 토성으로 쌓았다.진남문 오른쪽 바위엔 석수장이 출신지가 적혀있다.

 본래 성내엔 민가 160여채와 학교가 있었으나 시적으로 지정하면서 모두 철거하여 전남 승주
낙안읍성과는 매우 대조적인 분위기다.


 

 

 

 

 

▶ 

간월암: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간월도리

 

박무와 헤이즈 강하여 일몰을 볼 수 없어 아쉬웠다.
유독 참새가 많았는데 주지스님이 참새에게 먹이를 준다는 후문이다.

 

  

 

  
간월암 근처에서 생굴과 표고버섯을 구입하여 펜션에서 요리해서 저녁을 먹고,
남문토방펜션에서 1박을 하였다.이어폰으로 소음방지 귀마개를 대신하여 편안히 하룻밤을 잤다.


(이틀째)  7시 30분경 식사를 마친 후 일출을 보러 홀로나갔다.

짙은 구름으로 일출을 제대로 볼수 없었지만 구름덕분에 오히려 다소 드라마틱한 아침을 맞았다.


 


 9시30분 출발하여 현대 정주영회장의 소떼 방북과 유조선 물막이 공법으로 유명한
서산방조제를 가로질러 부석사로 향하였다.

 

▶ 

부석사:

충남 서산시 운산면(雲山面

)

신창리(新昌里) 상왕산(象王山)

   일주문에 적혀있는 "3일수심도량(三日修心道場)"이 눈에 들어온다.

초발심자경문 자경문편에 이런 귀절이 있다. "三日修心千載寶 百年貪物一朝塵"
(삼일 닦은 마음은 천년의 보배요,백년 탐낸 재물은 하루아침의 티끌이라)

 

 

 

현재의 국정농단사태가 저절로 떠오른다.


 

 S자 산길을 따라 올라가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구름이 머문다는 "운거루"이다.

 

 

 그리고 불이문과 같은 사자문이 나온다.

 


 겨울이라 낙엽이 지천이고 여기도 느티나무가 수호신처럼 서있다.
낙엽귀근(落葉歸根)이라고 했다.

잎이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는 뜻

.

"모든 일은 처음으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이다.

 

 

 일심동체 부부도 어떤때는 각자 가고 싶은 길이 있다.
이렇게 고즈녁한 산사에서는 각자 홀로 걷는 것이 사색에 좋다.
검은 옷,흰옷처럼 대조적인데 길도 흙길,계단길이다.

 

 

 

  산이 포근한 이불을 펼친듯한 내포를 그대로 닮아 참검처럼 찌른 암봉이 보이지 않는다.
그 모습 그대로 절집도 키를 낮추고 소박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곳 부석사가 편안한 이유다.

 

  
연못에 해수관음이 보이고 바위를 물결치는 파도를 닮았다.

용이 된 선묘낭자가 바다의 파도를 잠잠하게 된 덕분에
의상대사는 무사히 신라로 돌아 올 수 있었다는 전설이 떠오른다.

 카메라는 흑백으로 바꾸고 해수관음은 선묘낭자로 바꾸고 바위는 파도치는 모습으로
각도를 잡았다.선묘낭자와 바위는 희게 부각시키고 나머지는 검게 처리되도록 사진을 찍었다.

 절집다운 절집 서산 부석사의 기억은 오래 갈것이다.

 

 

 

▶ 

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151-8번지
송곡서원:

서산 

송곡서원 향나무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 495(류방택천문기상과학관 옆에 있다.)
 류방택이라는 분을 처음 알았다.불사이군의 고려말 대선비다.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제작한 분이다.

 

○유방택(柳方澤 : 충숙왕 7년(1320)∼태종 2년(1402))

여말선초 관료,천문학자,공신으로 호가 금헌(琴軒)이며, 시호가 정숙(靖肅). 서산(瑞山) 유씨 유성신(柳成臣)의
아들로, 조선 태조 때 돌에 별을 새긴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라는 「석각천문도」를 제작.
이에 앞서 천시(天時)를 점쳐 태조가 국왕의 자리에 오르도록 권고한 공으로 포상.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는 인정서원(仁政書院 : 지금의 송곡서원) 등에 배향.

 

 

 

 

 송곡서원 앞에 향나무 두그루가 문지기처럼 서있다.
1420년(세종2) 사마시에 급제한 유윤이 단종의 폐위를 보고 낙향하여 정원수로 심었다고 한다.

▶ 

서산 객사:

충청남도 서산시 읍내동

 일제강점기때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점심: 진국집:충남 서산시 읍내동 1)

 

   간판을 보니 중국 연길에서 본 듯한 붉은 글씨가 스레트 지붕위로 놓여있다.
개국지백반을 먹었다.전국맛집으로 이미 유명세를 치르는 곳이었다

.

 

 

▶ 

부성사: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산성리

 

 최치원 한분을 모신 재실 사당이다.최치원은 부성군 태수로 7년이나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의 후손인 경주최씨 최영호 교수님은 부성사에 마련된 의관을 정제하고 참배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풍류도맥에서 중요한 분이고 화랑 난랑을 위해 쓴 난랑비 서문鸞郞碑序文 중에
"나라에 현묘가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라는 글이 있다.

 

이곳에서 문창후 최치원의 영정을 볼 수 있었다.

 

▶ 

안견기념관:

충남 서산시 지곡면 화천리 59-1

 

 간밤 꿈에 박팽년과

 
 무릉도원을 노니는 꿈을 꾸었다.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더구나. 
 꽃이 지기 전에 그려라. 
 그 그림을 몽유도원도라 할 것이다. 
 
-안평대군- 

 기념관엔 안평대군의 꿈을 안견이 3일만에 그린 몽유도원도의 모사본이 있다.
원본은 아쉽게도 일본에 있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을 죽음으로 이끈 그림이다.

 

꿈이 헛꿈이 되고 말았다.
꿈을 꾼 사람 안평대군은 1453년 사사된다.
꿈에 동행한 사람인 박팽년은 1456년 옥사하고, 그들과 함께한 성삼문은 1456년 처형된다.
이개도 1456년 처형되어 사라진다.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안견은 생몰 연도 미상이다.
그러나 꿈을 버리고 수양대군을 찾아간 신숙주와 최항은 영의정에 올랐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11문자 살인사건" 추리소설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현실의 사건은 흑백이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많지.

 
선과 악의 경계가 애매하잖아.
그래서 문제제기는 할 수 있지만 명확한 결론은 불가능해."

 

"몽유도원도 찬시문" 책한권을 얻고서 읽어보니
안평대군과 찬시문을 지은 사람들 대부분이 그때만 해도 꿈꾸고 있었다.

 

 

▶ 서산동부수산시장:충남

 

서산시 동문동 900

 

 서산동부수산시장으로 왔다.이곳은 어리굴젓을 비롯하여 젓갈류의 종류가 많았다.
답사객 중 시장에서 쇼핑을 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나는 어떨결에 교수님과 동행하여
역시 막걸리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돼지머리수육에 서산막걸리로 시간을 보낸 후 정순왕후 생가와 김기현가옥으로 향했다

.

 

 

 

▶ 정순왕후 생가: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464 / 바로 옆에 계암고택(김기현가옥)이 있다.
ㅁ자 구조가 눈에 띄었다.단정하게 놓여진 분재가 인상적이었다.


 

 

 

 계암고택안의 고려와당박물관이 인상적이었다

.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출발하려는 순간
카메라 가방을 시장에 두고 온 것을 뒤늦게 알게되었다.

상황설명을 하고 다시 서산 동부수산시장으로 가니 가방을 둔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어서 회수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서산은 충청도에 있다.


" 그자리에 그대루 있쥬? 손 안댓시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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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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