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유교와 불교가 함께 흐르는 가을 단풍 답사길

(산청)높고 깨끗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인정 깊고 높은 생각을 가졌다.
         [부제:유교와 불교가 함께 흐르는 가을 단풍 답사길]

 

- 언제 : 2016.11.20  05:30~ 10:00
- 얼마나: 2016.11.20  11:20~18:50
- 날 씨 : 대체로 맑음,아침 저녁은 서늘,한낮은 더움
- 몇 명: 45명(고적답사회 동행/인솔:최영호 교수님)
- 어떻게 :신우관광버스 탑승



▷ 
부산→ 목면시배유지→ 배산서원→ 도천서원→ 문익점 묘소→(점심:목화식당,추어탕) →단성향교→
    단성 사직단→단속사→산천재→ 지리산성모상→구형왕릉→부산

 

지나간 역사를 통해 미래를 밝히는 고적답사 강행군은 올해 세 번째 답사길이다.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위해 오늘도 고적답사 회원들은 새벽부터 길을 나섰다.


시국이 워낙 급박하여 답사길 나서는 것도 약간 눈치가 보이는 시절이다. 대통령은 그동안 역사를 통해 무엇을 배운 것일까? 국민의 피와 땀으로 겨우 한발한발 힘겹게 선진국으로 나아가는데 단 한명의 대통령이 헬조선을 지나 고조선까지 되돌려 버린 느낌이다. 


이 사태는 전직 대통령의 딸이라 잘 할거라며 평생 백수로 지낸 정치인을 찍은 국민의 업보이고 60평생 귀족으로 살아 온 전직 대통령의 딸이 불쌍하다며 찍은 어르신들의 순진함이 빚어낸 참사다.


언제나 찍을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단지 사람 보는 눈이 없거나 욕심으로 그 진상을 보지 않은 탓이다.밝은 눈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언제나 이런 불상사는 다시 재현될 것이다.

 

오늘 답사길에 산천재를 들렀는데 남명 조식 선생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실천"이었다.

일전에 본 신문에서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한 신문을 보았다.남명 선생은 ‘경(敬)’과 ‘의(義)’를 학문의 중심으로 삼았다. 마음을 밝고 올바르게 하는 것이 경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의다. 남명은 항상 칼(경의검·敬義劍)과 방울(성성자·惺惺子)을 차고 다녔다. 


조창섭 교수는 “사사로운 욕심이 내장에 티끌만큼만 쌓여도 칼로 배를 갈라 맑은 물에 씻겠다는 뜻에서 검을, 이같은 뜻을 늘 깨우치고자 방울을 차고 다녔다”고 말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등 남명의 제자 50여 명이 의병장이 된 것도 바로 남명의 실천 유학 덕분이다.


산청을 다녀 온 후 산청에 대한 생각이 확 바뀌었다.맑은 산(山)에 청(淸)을 더하니 산청을 다니기만 해도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그리고 그곳에 사는 우리네 이웃들은 또 얼마나 인정이 넘치든지...감격을 여러번 하였다.오랫만에 맛보는 어릴적 외가집에 간 느낌이었다.

 

 

가장 먼저 간 곳은 목면시배지이다.여기서 목면시배유지 전시관 이영복 관장을 만나 
하루종일 함께 유적지를 답사하며 문화유산 해설을 해주셨다. 이영복 관장은 "물방울관음"
이라는 시집을 낸 시인(필명 이산)이라서 그런지 스토리텔링을 섞어 인상깊게 잘 설명해 주셨다.


 

 목면시배유지:경상남도 산청군 단월면 사월리 106-1

 

문익점(文益漸)과 유적지


처음 이름이 문익첨(文益瞻), 자가 일신(日新), 호가 삼우당(三憂堂). 강성(江城․丹城) 문씨 또는 남평
(南平) 문씨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공민왕 9년(1360)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과거에 합격한 이후,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한 문신관료. 공민왕 때 원나라에 사신일행으로 갔다가 덕흥군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돌아오는 길에 목면종자를 구해 왔고, 고려말의 사전(私田)개혁에
반대하다가 유배되기도 하였으며, 조선왕조의 개창에 참여하지 않은 두문동세력으로 분류되기도 함.
 조선 태조 때에는 목면 보급의 공적을 인정받아 좌사의대부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고사. 사후인
태종 때에는 강성군(江城君)으로 봉해졌다가 세종 때에는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고,
충선공(忠宣公)의 시호를 받음. 초계 주씨(草溪周氏) 주세후(周世候)의 딸 및 진양 정씨(晉陽鄭氏)
정천익(鄭天益)의 딸과 각각 결혼하여 딸 1명과 아들 5명을 낳음.

목면은 장인 정천익이 재배에 성공하여 100여개의 씨앗을 확보하고, 그 직조 기술을 획득한 이후
고려말에 삼남지역에 파급. 그 시배지가 현재의 배양마을. 문익점은 이후 도천서원(道川書院)에 배향.
 묘는 그 뒷산.

 

 


전시관 내부에 실제로 목화를 재배 한 퇴헌 정천익과 삼우당 문익점의 주고 받은 시가 보였다.
아마도 시를 사랑하는 관장님의 센스가 아니지 모르겠다.


퇴헌 정천익이 이르기를

"세상의 일 지저분하여 내 보려 하지 않거니와,
뜰에 가득한 송죽은 깨끗하고 고요하기도 하다."

삼우당 문익점이 화답하기를

"산에 구름 끼고 시내에 물새 놀아 그윽한 흥취 감도는데,
그 누가 수풀 안에서 고요히 수양하심을 알겠소이까?

이런 성품이었으니 그 귀한 목화를 심어서
그저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데 일념을 바친 것이다.



1906년 일본 도요타 그룹
(TOYOTA MOTOR CORP 시가총액 21,226십억엔 / 원화환산 212조 : 2016.11.21기준)
의 창업주인 도요타 시키치가 
1890년 발명한 목화 솜을 가공해 실
을 뽑는 목제인력직기로 시작으로 대재벌이 된 것을 보면
문익점이 장사적 수완이나 추구하는 방향이 돈이었다면
지금 한국에 후손들이 재벌 그룹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영조가 간택한 정순왕후 책봉에서 영조의 가장 아름다운 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라는 말로
영조를 감탄시켰다고 한다.자세히 보니 복슬 강아지처럼 탐스럽고 귀엽고 예쁘다
.


 배산서원: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배양길 16 (단성면)

 

배산서원에 가니 아이러니하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40여명이 조용하게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래도 번잡스러울만도 한데 전혀 불평의 말도 없이 어르신 한분이 문묘의 공자 영정을 보여주었고
나올때는 떡과 유과마저 챙겨주셨다.


배산서원의 배산서당 현판 글씨는 중국 학자인 강유위의 글이다.
제사를 지내고 있어서 백범 김구·성재 이시영·우천 조완구·백암 박은식 선생의 배산서당 낙성축문 현판은
멀리서 그 형체만 볼 수 있었다.


배산서원은 도천서원에 모시고 있던 청향당 이원과 죽각 이광우를 따로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1919년에 새로 지어 배산서당이라 하였다. 서원 안에는 문묘, 도동사, 강당이 있다.


 



배산서당 오른쪽 뒤로 가면 동도사가 나오고 그 뒤에 문묘가 나오는데 그곳에 공자의 영정이 있다.
그동안 여러곳의 서원을 탐방했지만 이렇게 공자의 영정을 본 것은 정말 크나큰 행운이었다.


 



 

 

도천서원,문익점 묘소: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도천서원은 문익점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도천서원으로 들어가기 전 우측 산길로 10여분 오르면 문익점 선생의 묘소가 나온다.


 


 

 

 

점심식사는 농협 근처의 목화식당에서 추어탕을 먹었다.
(목화식육식당: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목화로 995)


추어탕은 시원했고 맡반찬은 깔끔했다.

 

 

 단성향교: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강루리


마을입구에서 빨래하는 모습을 보았는데 잃어 버린 장면을 다시 발견한 듯 반가웠다.
빨래터를 지나니 정겨운 돌담이 이어지고 곧 계단을 오르니 명륜당 누각이 나타난다.
고려 인종때 현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고 다른 서원과는 다른 자리배치가 돋보인다.


 

 

단성향교


12세기 초기 고려 인종 때 창건한 국립중등교육기관. 향교는 뛰어난 유학자의 제향과 지역사회의 유교
교육․교화․문화공간으로 역할하면서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을 지급받음. 현재의 건물은
조선후기. 건물 구조는 외3문 안에 명륜당(明倫堂 : 강학공간)을, 내3문 안에 대성전(大成殿 : 문묘공간)
을 배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 명륜당 뒷쪽 좌우에는 학생들의 생활공간인 동․서재를 배치하여
일반적인 향교건물의 구조에 비해 특이.


한편 본 향교의 장경고에는 원래 단성관아에 비치된 「단성현 호적장적」 13책이 보관. 이 호적장적은
숙종 4년(1678)~정조 13년(1789) 단성현에 있던 가구의 소재지, 호주와 호주의 처, 신분, 성명, 연령,
본관, 사조(四祖), 고공(雇工)과 소유노비의 부모․이름․나이 등을 기록하여 지역사회의 인구구성과 사회
생활상 등을 파악. 조선시대 호적장적은 식년(式年 : 子․卯․午․酉年의 3년마다)에 면․리 단위로 작성하여
각1부씩 감영과 중앙의 호조에도 보관.

 

 


 

 

 단성 사직단:경상남도 산처군 단성면 사월리 산 54-1 외 1필지

 

 단성 사직단(社稷壇)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는 나라의 신과 곡식의 신에 제사지내던 제단으로 조선초기에 건립. 중앙
에서는 대개 사단(社壇)을 동쪽에, 직단(稷壇)을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단상에는 석주(石柱)를 설치.

각 지방관아에도 관아의 서쪽에 사직단을 세우고 국태민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를 지냄.
단성 사직단은 지방 사직단의 형태.

 

 



조선초기에 만들어진 후 단 한번도 끊어짐 없이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일제강점기 때는
일제의 압박과 고문으로 마을 주민들이 고초를 겪었지만 장소를 옮겨가며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사직단은 토신(土神)인 사(社)와 곡신(穀神)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주관은
원래 나라 관청에서 한다.일제시대때는 마을주민들이 동제처럼 지냈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주인의 역시 민초들이다.지금은 농협에서 제물을 준비하고 주관한다.


 

 단속사지: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여전히 단속사터는 아직 발굴과 복원이 안된 상태이다.근처 정당매 주위는 풀도 베지 않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올해는 꽃도 피우지 못했다고 하니 폐사지의 쓸쓸함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근처 민가들이 있어서 그나마 그 쓸쓸함이 반감되는 모습이다.


 

삼층석탑 2기는 경주 감은사지 쌍탑을 약간 축소 해놓은 모습일 뿐 그 모습이 똑 같다.
통일신라시대 작품인 것이다.

 

 

 

단속사(斷俗寺) 터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지리산에 있던 선종사원으로, 통일신라 경덕왕 때 창건되어 조선 성종
때까지도 존속. 통일신라 때에는 신행선사(神行禪師)와 최치원(崔致遠) 등이 머물렀고, 고려 인종~예종
때에는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이 주석. 고려 고종 때에는 무인집권자 최이(崔怡)의 아들 만종
(萬宗)과 함께 수선사(修禪社․松廣寺)의 주지를 역임한 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과 자진원오국사
(慈眞圓悟國師) 천영(天英)도 주지. 세종 때까지 고려국분사도감에서 조성된 이규보(李奎報) 저술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㰡•의 목판을 소장. 솔거(率居)가 그린 「유마상(維摩像)」도 있었다고 전함.
현재에는 보물 72․73호인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헌덕왕 5년(813) 병부령 김헌정(金憲貞․金獻貞)이
찬술한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 : 현재 비편 일부가 동국대 박물관에 보관)」와 최치원이 썼다고 전하는
광제암문(廣濟巖門)이라는 석각을 비롯하여 고려 때 건립된 「진정대사비(眞靜大師碑)」․
「대감국사비(大鑑國師碑 : 坦然, 사본이 문경 金龍寺 보관, 비편 일부가 숙명여대 박물관에 보관)」가
전함. 한편 여말선초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한 강회백(姜淮伯)이 우왕 2년(1376) 과거시험에 합격
하기 전에 이 곳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면서 심은 정당매(政堂梅)라는 매화나무도 현존.





 산천재: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는 곳에 산천재를 지었다는 것을 보더라도 노장사상이 엿보인다.
남명학은 수기치인이라는 성리학에 실천궁행을 강조했다.실천궁행을 좀더 구체화한 것이 바로 敬
(마음이 밝은 것)과  義(밖으로 과단성 있는 것)인데 쉽게 말하면 생활철학으로 보면 된다.


산천재 주렴에는 남명 조식의 7언절구가 주렴으로 걸려있다.


山底(춘산저처무방초)
(지애천왕근제거)
(백수귀래하물사)
(은하십리끽유여)

봄산 아래쪽엔 향기로운 풀 없으랴마는
천제 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만 좋아라.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냐고?
은하수처럼 십리 흐르는 물 마시고도 남으리.


제목은 "덕산에 터를 잡고"이다.


산천재 앞에는 400여년된 남명매가 있고 우측 두그루 소나무 사이로 천왕봉이 바로 보인다.


남명이 매화를 보고 시를 지은 것이 있다.


(매화)

(세만견거난독립)
한 해가 저물어가니 홀로 지내기 어려운데

(설침잔야도천명)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까지 내렸구나

(유가구시고한심)
선비 집은 오래도록 외롭고 쓸쓸했는데

(경이귀래경득청)
매화가 피어나니 다시 맑은 기운 솟아나네


‘산천()’은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산천재는 열심히 공부하고 수련하는 공간이라는 뜻이다.

산천재는 비록 서너 칸짜리 건물일 뿐이지만, 산천재 마루에 올라 위를 올려다보면
‘산천재’라는 현판 주위로 농부가 소를 모는 그림, 신선이 소나무 아래 바둑을 두는 그림,
버드나무 밑에 귀를 씻는 선비와 그 물을 자기 소에게 먹일 수 없다며 소를 끌고 가는 농부의 그림 등이
새롭게 그려져 있다.단청을 해놓아서 예전 같은 고졸한 멋은 잃었다.



 

 지리산 성모: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천왕사

 

지리산 "천왕 할매"를 보러 중산리로 간다.


 

지리산성모(智異山聖母)


지리산의 천황봉에 봉안된 토착산악여신. 신라시대 때 국가․지역사회의 수호신으로 지정.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가 봉해졌으며,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도 봉안되었다고 함.
고려 명종이 사라진 신상의 머리를 찾게 하였으며, 우왕 때에는 왜구의 격퇴를 위해 비가 그치도록 빌어
성취. 15세기 후반 김종직의 ”점필재집• 권2, 「유두류록(流頭流錄: 지리산)」에서도 천왕봉에 설치된
성모묘(聖母廟)에서 고사를 지냈다 함. ”동국여지승람•, 진주목, 사묘에도 청왕봉에 있는 성모상이
여신이며, 그 영험이 컸다고 기술. 한편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승려 천연(天然)이 성모사를 음사의
본거지로 인식하고 파괴하였으며, 김종직도 고려말 왜구들이 성모상을 훼손하였다고 함.

 

 

여전히 대나무와 청송이 푸른빛을 더 발하고 있지만 늦가을 나무들이 색깔을 뽐낸다.
천왕사라는 "개척 절"에 지리산 성모가 있다.보면 볼수록 정감이 가는 얼굴 형태이지만
그 내막을 듣고 보니 안타깝기만 하다.


조속히 본지환처(本地環處)되길 기대해 본다.




 

 

 구형왕릉: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

날씨가 어둑해진다.12년만에 등산이 아닌 문화유산 답사로 왕산을 다시 찾았다.
 

 

구형왕릉


금관가야 마지막 국왕이자 김유신의 할아버지인 구형왕(仇亥 : 讓王)의 무덤, 또는 석탑으로 추정.
후자의 견해는 안동과 의성지역에 분포한 석탑과 유사하다는 점이며, 전자의 경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의 내용이나 홍의영(洪儀泳 : 18세기 후반~19세기 초)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 및
”가락편년기(駕洛編年記)」 등의 내용을 근거. 현재에는 돌무덤의 중앙에 ‘가락국양왕릉(駕洛國讓王陵)’
이라 쓰인 비석이 존재.

 

 

구형왕은 시조 수로왕부터 10대왕으로 가락국 마지막왕이다.
구형 혹은 구해가 이름인데 신라에 가락국을 양도했기 때문에
양왕으로 불리어진다.


남한에서는 보기드문 돌을 쌓은 적석총이다.피라미드 형태의 무덤 중간엔 감실이 있다.


가락국 500년의 찬란한 문화가 남긴 유적은 수없이 많았으리라고 짐작이 되지만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거의 파손 도난으로 실전되어 오늘에 전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신라 백제 고구려는 시조왕릉까지도 실전되고 없는데
오직 가락국만이 시조 대왕과 왕후릉이 김해 가락국의 옛 도읍에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니
참으로 후손들의 긍지이며 대왕의 홍복이라 하겠다.


이는 김해김씨의 꾸준한 조상의 성역화사업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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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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