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4개의 강이 바다를 만나 서울과 개성의 어귀에 우뚝 솟은 한국의 역사가 숨쉬는 곳

 

- 언제 : 2016.1.9  05:30~ 2016.1.10 22:30

 

- 얼마나: 2016.1.9  15:00~2016.10.15:30

 

- 날 씨 : 대체로 맑음
- 몇 명: 42명
- 어떻게 :고적답사회 동행/인솔:최영호 교수님



▷ 

부산→(점심,이천 돌솥밥집632.2300)초지진→광성보→고려궁지→대한성공회 강화성당→전 선원사지
→이규보 묘
→숙박(마니산 월드)→석모도 낙가산 보문사→강화도 고인돌→전등사,정족산 사고→부산

 

2009년 등산목적으로 강화도를 탐방 한적이 있다.첫날은 마니산 산행을 하고 그날 저역 석모도로 들어가 1박 한후 해명산에 이어 낙가산 보문사로 하산한 경험이 있는 곳이다.그러나 이번엔 등산 보다는 문화유산답사차 강화도를 찾았다.

강화江華,이름 그대로 풀이하자면 "강이 빛난다"는 의미다.바다에 있는 섬인데도 강의 이름이 나오는 것은 왠일인가? 인천광역시 소속의 우리나라 4번째로 큰 섬인 이섬은 한강,임진강,예성강,한탄강의 퇴적물이 쏟아져 나오는 강물과 바닷물이 합쳐지는 기수지역에 위치하고 있다.그래서 강화의 바다는 갯벌의 물과 같이 혼탁하지만 이곳은 이런 이유로 황금어장이다.강화도 특산물 중 하나인 추젓 생산량의 70%가 강화 앞바다에서 생산된다고 하니 강화江華의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강화도 마니산엔 참성단이 있다.마니산은 머리를 뜻하는 "마리"에서 한자로 취하는 과정에서 "摩利山마리산"이 되었다고 한다.한반도의 가운데 쯤에 솟아 있는데,마니산 정상에서 가늠해 보면 남쪽 한라산까지와 북쪽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같다고 한다.그 세 점을 이으면 긴 삼각형을 그릴 수 있는데, 가운데 꼭지점이 마리산이 되는 것이다. 머리산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유적으로 참성단(塹城壇)을 꼽을 수 있다.그래서 강화개천대축제를 매년 10월초에 연다.


서울과 북한 개성의 입구에 있는 강화도는 한국의 수도인 서울을 공격하기 좋은 입구에 있다.고려 무신정권때는 해전에 약한 몽골의 공격을 피해 임시 수도 역할을 한 곳이었다.그러나 19세기 열강들의 식민지개척으로 팽창하던 시기에 병인양요(1866년),신미양요(1871년),운요호사건(1875년) 등 열강의 공격을 받은 곳이다.우리나라는 대륙에서 돌출되어 큰 생기처이지만 그중에서도 더욱 민감한 지역이 강화도라고 보면 강화를 차지하는 나라가 서울과 한국을 지배하게 되는 셈이다.서울의 입을 넘어 한국의 입에 해당하는 곳이다.

 

 

1.9 15:00

 

기상예보와는 달리 기온이 너무 따뜻하다.옷을 투텁게 입고 왔지만 결과적으로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리고 역시 부산에서 강화까지는 멀다.보통 이렇게 장거리를 갈때는 책을 읽는 편인데
버스의 히터열기까지 합해져 일찌감치 책읽기는 포기를 하였다.이천 돌솥밥집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가장 먼저 강화의 유적지에 간곳은 초지진이었다. 

 

▶ 초지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624

 

○초지진(草芝鎭)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위치한 사적 제225호로, 숙종 42년(1716) 강화해안을 방어할 목적으로
설치된 진보(鎭堡 : 군사 시설). 고종 8년(1871) 미국제국주의가 침략한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광성보(廣城堡)와 함께 주요 전적지였으며, 1875년 일본 제국주의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운요호(雲楊號)사건
때도 전투지역.

 

 

병인양요

(1866년),신미양요(1871년),운요호사건(1875년) 등 강화도와 뭍 사이 바다길 첫번에
설치된 초지진은 강화도 역사탐방 첫번째 장소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병인양요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탄압에 대항하여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으로 


11월 11일 프랑스군은 1개월 동안 점거한 강화성을 철거하면서, 장녕전(
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다.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우어, 
척화비(斥和碑)를 만드는 등
쇄국양이(
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게 만들었다.

 

신미양요는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이다.

 

운요호 사건은 일본 군함 운요호가 포함외교(

砲艦外交)의 일환으로, 1875년 9월 20일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이다.


그 후 일본은 다시 강화도 앞바다에 무력시위를 하며 나타나, 이 사건의 책임을 조선에 물으며
수교통상을 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인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
江華島條約)'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강화도(
江華島)는 한강 어귀에 위치하여 외세가
서울(한양)에 접근하는데 가장 가까워 서울 위협을 위해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 중 초지진은 그런 역사적인 장소의 최선두지점이다.
오늘은 두그루의 소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성벽과 소나무에 포탄흔적이 남아있다.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 이후 재개된 대북확성기 방송은 북한의 대남 확성기 방송으로 맞불이 되어
이곳까지 긴장이 높아졌다.강화도 위쪽 개성과 예성강 유역은 북한이니 이곳은 사실상 국경지역이다.  

 

 

 

 

 

15:23

▶ 광성보: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가장 격전지였는데 1871년 4월 24일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면서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군 지휘관 어재연 장군 이하 전 용사가 열세한 무기로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돌과 맨주먹으로 싸워 한 사람도
물러서지 않고 장렬히 순국하였다.그 처절함이 온몸으로 느껴져 한기가 느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광성보 안의 용두돈대는 기암괴석과 소용돌이 치는 물결을 바라보는 곳으로
강화의 돈대 중 가장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곳이다. 

 



과 

는 군사상 중요한 지역인 해안변방에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던 군사주둔 지역이다.

돈대

는 조금 높직한 평지에 초소가 있던 곳을 말한다. 

강화 5진 7보 53돈대

 

1)강화도의 해안선을 따라 53 곳에 있는 강화53돈대를 관할하는 진과 보이다.2)진과 보는 모두 조선시대의 군대를 뜻하는 것으로 진은 요즘 군대의 대대, 보는 요즘 군대의
중대 규모에 해당한다.

그러나, 진과 보 사이에는 상하 관계가 없다. 그리고 진, 보 아래에는 돈대가 소속되어 있다. 

1.강화 5진

 1)월곶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월곶리.2)제물진 : 강화5진의 하나. 강화읍 갑곶리.3)용진진 : 강화5진의 하나. 선원면 연리. 향토유적 제8호.4)덕진진 : 강화5진의 하나. 불은면 덕성리. 사적 제226호.5)초지진 : 강화5진의 하나. 길상면 초지리. 사적 제225호. 

2.강화 7보

 1)광성보 :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강화7보의 하나. 사적 제227호.2)선두보 : 강화7보의 하나. 길상면 선두리.3)장곶보 : 강화7보의 하나. 화도면 장화리.4)정포보 : 강화7보의 하나. 내가면 외포리.5)인화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인화리.6)철곶보 : 강화7보의 하나. 양사면 철산리.7)승천보 : 강화7보의 하나. 송해면 당산리. 

3.강화53돈대

 강화에 있는 국방 유적으로 53개소의 돈대를 말한다.  갑곶돈대, 계룡돈대, 덕진돈대, 택지돈대, 장곶돈대, 광성돈대, 선수돈대(송강돈대), 무태돈대,
좌강돈대, 초지돈대, 삼암돈대, 분오리돈대, 손돌목돈대, 가리산돈대, 걸곶돈대, 건평돈대,
검암돈대, 광암돈대, 굴암돈대, 귀등돈대, 낙성돈대, 동검돈대, 망양돈대, 망월돈대, 망해돈대,
미곶돈대, 북일곶돈대, 불장돈대, 빙현돈대, 섬암돈대, 석각돈대, 석우돈대, 숙룡돈대, 속우돈대,
송곶돈대, 양암돈대, 오두돈대, 염주돈대, 옥창돈대, 용강돈대, 월곶돈대, 의두돈대, 인화돈대,
작성돈대, 장자평돈대, 적북돈대, 제승돈대, 천진돈대, 철북돈대, 추루돈대, 화도돈대, 후애돈대,
휴암돈대 등이 있다.

 

 

 

 

 

16:28 

 

강화도가 고려시대 임시수도를 한 곳이다.지금도 강화도 사람들은 임시수도를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내가 사는 부산도 6.25전쟁시기에는 임시수도였으니 이런 곳은 지형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강화는 조선시대때도 상당히 중요한 곳으로 인식한 모양이다.


강화도 근처 교동도를 보면 

최충헌에 의해 쫓겨난 고려 21대왕 희종,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
11명의 왕족이 유배되었던 장소였음을 감안하면 강화도는 사람이든 서책이든 보관장소로
안성마춤이었던 곳으로 판단된다.

 

▶ 외규장각(고려궁지 내):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163

 

○외규장각(外奎章閣)

 

정조 6년(1782) 강화도에 설치한 왕립 도서관인 규장각의 부속 도서관으로, 왕실의 관련 서적을 보관.
이후 왕실이나 국가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의궤(儀軌)를 비롯한 귀중 서적을 보관하다가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침략 프랑스군이 의궤 등을 약탈되거나 소실. 2011년 프랑스는
약탈문화재를 계약갱신의 임대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대여.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고려궁지는 병자호란으로 파괴되었는데 이후 병인양요를 겪으면서 다시 파괴되었다.

 

지금은 발굴 복원이 진행 중이다.뒷산에 축대의 생김이 남다른다.
강화 외성,중성,내성을 떠올리며 고려궁지에 서니 일몰빛이 구름을 불태운다.

 

▶ 고려궁지: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163

 

○고려궁터(高麗宮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위치한 고려 강화경(江華京) 때 지어 운영한 궁궐로,
현재 사적 제133호로 지정. 몽골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목적으로 고종 19년(1232)
개경(開京 : 지금의 개성직할시)에서 강화로 천도한 이후 원종 11년(1270) 개경환도 때까지
임시수도로 역할한 강화경에 설치․운영된 궁궐터. 강화궁궐과 관아는 천도 2년 이후에
일단 정비. 개경환도 이후에 궁궐을 무너뜨렸으나 조선시대에는 행궁이 설치.
이후 병자호란 및 병인양요 등을 겪으면서 파괴.

 

 

 
 
 
17:05
 
성공회 강화성당은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내부는 서유럽의
바실리카(
Basilica)양식과 외부는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여 묘한 매력이
있는 건물이다.사찰양식은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성공회 문양이 들어간 동종이라든지 마당에 있는
보리수 나무 두그루도 불교양식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11호.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한국명:고요한)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
 
강화도는 외세의 침입이 시작된 곳이라고 보았을떼 보통 외세는 전쟁과 기독교를 함께 들여오는데
이곳 강화에 현존하는 최초의 성당이 있다는 것은 환영하기 이전에 씁쓸한 인상도 함께 든다.
그나마 한옥형태의 사찰양식은 토착화 선교를 지향했다고 볼 수 있다.
 
성공회 [ The Anglican Domain , 聖公會 ]는 1534년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해나간 영국 국교회의
전통과 교리를 따르는 교회를 총칭하는 말이다.
 
▶ 성공회 강화성당: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250
 
 
 
 
17:41
 
▶ 강화 선원사지: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 133
 

1232년(고려 고종 19) 최이(

崔怡:최우)가 호국사찰로 창건하였다.지금은 복원과정에 있는데 
뒤쪽 선원사지는 말그대로 터만 남아있다. 현재의 선원사는 사찰치고는 다소 경박한 분위기가 흐른다. 

기원 마케팅(?)이 여타 사찰대비 가볍다는 인상이다.

 
○전 선원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에 위치한 사원으로, 현재 사적 제259호. 몽골의 침략으로 강화경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고종 32년(1245) 무인집권자 최이(崔怡)의 원찰로 창건. 공민왕 9년 윤5월
왜구의 침략으로 약탈되기 이전까지 500여칸의 건물에 수 백명 이상의 승려들이 머물고,
40,000석 이상의 곡식을 보관할 수 있던 매우 큰 규모의 사원.
 
 
 
 
▶ 이규보 묘소: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 133
 
이미 어둑해졌다.그러나 문화유산 답사는 이어진다.술한잔이 시 한수였던 지독한 애주가였던 이규보를
위하여 막걸리 들고 이규보 묘소를 찾았다. ·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라
불리었다. 
 
이규보(1168∼1241)는 고려 무신정권이 시작되기 2년 전인 극도의 혼란기에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당대의 걸출한 문사였다. 문인으로서 화려한 관직의 등용과 순탄한 벼슬길을 꿈꾸었던
이규보는 여러 번 좌절과 시름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최충헌의 눈에 들어 결국
문하시랑평장사(
門下侍郞平章事)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6살에 지었다는 그의 시를 보면 천재성이 느껴진다.

花笑聲未聽 (화소성미청) 鳥啼淚難看 (조제누난간)
 "꽃이 웃으나 소리는 들을 수 없고 새가 우나 눈물은 보기 어렵구나."
(필사)


 
 

그의 저서를 모은 53권 13책의 동국이상국집이 있다.
 
그 의 시 중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시가 있다.

山僧貪月色(산승탐월색) 
幷汲一甁中(병급일병중) 
到寺方應覺(도사방응각) 
甁傾月亦空(병경월역공)

산승이 달빛을 탐내
병 속에 물과 달을 함께 길었네
절에 돌아와 비로소 깨달으리
병을 기울이면 달도 따라 비는 것을
 
 

(1박) 마니산 월드 


▶ 마니산 월드: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로 686  

 
저녁 식사는 꽃게탕을 비롯한 밑반찬들이 정갈했다.다음날 새벽1시까지 순무 안주를 비롯한 막걸리
파티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방은 굉장히 따뜻하여 흡사 온들방에 잔것 처럼 개운했다.

2016.1.10
 
마니산월드에서 다음날 아침식사는 해장을 할 수 있는 북어국이 나왔다.
 
09:05
 
배를 타고 석모도로 향하였다.갈매기 나르고 흐리지만 날씨는 에상외로 따뜻하였다.

 
09:46~10:40

3대 관음도량인 보문사로 향한다.
 
▶ 석모도 낙가산 보문사:인천 강화군 삼산면 매음리 629 
 
○보문사(普門寺)
양양 낙산사 및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觀音)기도도량으로,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낙가산(洛迦山)에 위치한 사원으로 선덕여왕 때 창건. 극락보전 앞에 장식되어 있는 두 마리 용두의
모습은 여의주를 물고 있음. 충렬왕 때 국빈의 대우로 고려사회로 왔던 중국의 고승 철산(鐵山)
소경(紹瓊)은 당시 보문사(普門社)에 소장되어 있던 6천권의 고려대장경, 인경본을 가져가기도 함.
 
 
 
 
 
 
 
▲낙가산 보문사 마애석불좌상:문사 대웅보전의 오른쪽으로 돌면 눈썹바위 아래에 새겨진 마애석불좌상
(磨崖石佛坐像)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420계단을 올라 와야 하지만 올라오는 동안 
내려다 보는
보문사의 전경과 먼바다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새해를 맞이하여 기원소리 가득하다.
 
 
 
▲낙가산 보문사 마애불 가는 길 420계단
 
▲낙가산 보문사 극락보전 아래 보이는 12지신상 중 원숭이(申)
 
 

▲낙가산 보문사 향나무

 
▲낙가산 보문사 500나한전
 
 
10:22
 
다시 석모도에서 강화도로 나와 부근리 지석묘를 보러 갔다.
강화도 고인돌은 봄철 진달래군락으로 유명한 고려산을 중심으로 120여기로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강화도 부근리 지석묘:인천광역시 하점면 부근리 317
 
 
 
 
 
14:40~15:03
 
전등사는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안에 있는 신화적인 현존 최고最古의 사찰이다.
사고를 지키는 사찰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았다.
 
▶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전등사(傳燈寺)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삼랑성 안에 위치한 사원으로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
조계사의 말사.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고 전함. 원종 7년(1266) 중창,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충렬왕 8년(1282)
승려 인기(印奇)에게 송나라의 대장경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전등사로 개명. 이후 수 차례 중수. 숙종 때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원으로 왕실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 사원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
다수의 보물이 현존하며, 애절한 전설과 역사적 사연도 현존.
 
▲전등사 나부상:여러가지 전설이 있다.그 중 원숭이 전설도 있다.
 
▲삼랑성 정족산 사고:장사각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의 정족산성 안에 위치한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있었던 사고.
효종 4년(1653)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의 화재로 정족산성에 사고를 새로 지어 현종 1년(1660)
남은 역대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璿源錄) 등을 옮겨 보관. 이들 서적은 일제강점기에 총독부․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겼다가 현재까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 건물로는 장사각(藏史閣)․
선원보각(璿源寶閣)과 함께 사고를 지키던 군사들이 사용한 취향당(翠香堂)으로 구성.
한편 고려시대에는 정족산이 전등산(傳燈山)이라 함.
 
▲삼랑성 정족산 사고 옆 복원된 선원보각(왕실족보 보관장소)
 
 
 
 
솟대에 형형색색 소원지를 걸어 탑을 만들었다.절집의 마케팅은 날로 새로워진다.
정족산 전등사 남문에 위치한 남문식당에서 마지막 막걸리 파티를 열고
부산까지 기나긴 귀로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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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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