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옳다고 생각한대로 거침없이 살다간 한밭골 위인들

 

- 언제 : 2015.5.31  05:30~ 21:30
- 얼마나: 2015.5.31  10:00~17:50
- 날 씨 : 대체로 맑음
- 몇 명: 44명
- 어떻게 :고적답사회 동행/인솔:최영호 교수님



 부산(교대앞)→ 우암사적공원→ 동춘당공원→ 계족산성(점심)→ 화폐박물관→ 단재 신채호 생가→ 부산

 

 


 
  

한밭골 대전은 인연이 있다.서대전 근처 충남대 후문에서 위치한 문화동에서 군대생활을 한곳이었다.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 흔적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그러고 보니 초,중,고 생활을 했던 학교들도 이름만 남고 내가 생활했었던 실제 건물은 없어졌고 위치도 모두 바뀌어졌으니 이것도 무슨 아이러니한 상황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젊은날 청춘의 기억들이 무더기로 떨어져 있는 곳이니 그곳을 가는 느낌은 남다르다.부산에서 대전은 제법 거리가 있는 곳이라서 왕복하는 시간을 빼고 나니 실제 답사시간은 7시간 정도로 길지 않았다. 




전일 서울여의도 사진출사로 인하여 새벽 1시에 도착하여 너댓시간 눈 붙이고 
5시30분에 일어나 6시20분까지 교대앞으로 나갔다.


아침 6시20분 부산 교대앞에서 출발하여 우암사적공원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경이었다.
나의 뒷자리 어린학생 둘의 수다는 보통의 아줌마 수다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줌마 수다는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어서 시장(market)을 두개정도 짓는다면
어린이의 수다는 분에 넘치는 왕성한 양기로 인하여 빌딩(?)을 짓는다.




○우암사적공원

조선 선조∼숙종 때 문인지식인으로 활동한 우암 송시열 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남간정사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호), 우암 송시열 등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남간사, 우암이 벼슬에서
물러나 
세운 기국정 등이 있는 사적공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기국정으로 우암송시열이 효종5년(1654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소재동에 와
있으면서 연못가에 세운 건물로 소제방죽 근처에 구기자와 국화가 많아서 기국정이라 부르게 된다.
현재의 기국정은 원래자리가 아니다.


 


이곳은 우암 송시열의 사적고원이다.


○송시열(宋時烈 : 1607∼1689년)

은진(恩津 :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지역) 송씨로 호가 우암(尤庵)․유재(尤齋). 외가인 옥천군
구룡촌에서 태어나 인조 10년(1632)까지 거주. 뒤에 회덕(懷德 : 대전광역시 대덕구 회덕지역)의
송촌(宋村) 등지로 옮겨가며 거주하여 회덕 사람으로 인식. 8세 때부터 친척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 인조 11년 생원시에 장원 합격하고 2년 뒤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의 사부로 활동. 병자호란 이후에는 10여녀동안 초야에서 학문 전념.

효종의 즉위 이후 관직에 다시 등용. 존주대의(尊周大義 : 춘추대의에 의거하여 中華를 명나라로
夷賊을 청나라로 구별) 등을 밝히 「기축봉사(己丑封事)」로 효종의 북벌계획 중심 인물로 활동.
현종 때 우의정․좌의정 역임.하다가 정치적 부침을 하다가 숙종 8년(1680)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정권을 잡으면서 정계복귀. 노론의 영수이며,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발전시킨 주자학의 대가. 주요 저서로 시문집 󰡔송자대전(宋子大全)󰡕 등을
저술.
사육신인 충정(忠正) 박팽년(朴彭年)의 절의를 기린 「회덕박선생유허비(懷德朴先生遺墟碑)」도 지음.





 


송자대전이 있는 장판각을 둘러본 후 유물관으로 들어갔다.





귀이(耳)에 마음심(心)을 합하면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니 부끄러울 치(恥)가된다.
우암은 병자호란의 부끄러움을 염두에 두고 갈필(칡붓)로 이글을 적었다고 한다.


그의 과거 답안지 복사본이 보인다.


음양론의 변화 이치는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다. 즉 우주 속에서 벌어지는 변화상은
한마디로 한 번 양이 되고 한 번 음이 되는 과정의 순환이다. 


주역에서는 우주 삼라만상의 가장 기본적인 실체를 ‘기(氣)’로 본다.
기는 실체적 개념일 뿐 아니라 영향을 주고받는 기능적 매체이기도 하다. 주역은 ‘기’ 하나의 개념으로
모든 사물을 이해·설명하는 ‘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의 작용과 변화 원리를 나타낸 구체적인 개념과
이론이 ‘음양오행론’이다.
오행은 만상의 탄생과 소멸, 변화를 주관하는 다섯 가지 기초 원소인 ‘목화토금수’다.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외적 변화에 대한 관찰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주역은 바로 이런 자기 성찰을 통해서 스스로를 재건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정보 전달이나 예언의 기능에서 나아가 점치는 자의 주체적 깨달음을 도와주고 조언해주는
기능이 
점점 강화된다. 이게 오늘날 우리가 주역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암은 극단적인 찬사로 송자대전으로 나타나는 송자로 칭송되기도 하지만
극단적인 저주로
조선 역사에서 역모가 아닌 경우에 사약을 받은 사대부는 송시열 밖에 없다.


속리산 화양계곡에 가면 그의 글씨가 있는데 "大明天地 崇禎日月"이라고 적은 바위에 새긴 글씨가 있다.

이는 조선의 하늘과 땅,해와 달도 명나라 것이"이라는 뜻이다.


중립외교와 실리외교로 국제적 역학관계의 균형을 잡아간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반정으로 
멸망을 앞에 둔 명나라를 지지했으니 청나라 누르하치에게 인조가 무릎을 꿇은 치욕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 사상을 가진 인물이니 "해동건곤 존주대의"다.그런데 해설을 읽어보니 가관이다.

"비록 중화를 흠모하는 사대주의적 측면도 있을 수 있으나 오히려 중화의 문화가 우리나라에서 실현되는
문화적 자존의식이나 도덕적 명분으로 천하를 통합하고자 하는 도덕적 세계주의,외세의 비도적적 침략에
대항하여 항전하는 민족적 자주의식 등 여러갈래로 해석되고 발전되었다."


노론이 친일파가되고 친일파가 한국의 기득권 세력이 된것은 우암의 공도 크다.

시대적인 배경이 다르다고 해도 참 받아들이기 힘든 사상이다. 

  




우암이 사용했었던 인장 중에 중간에 보이는 둥근 어안(魚雁)이 인상적이다.
물고기는 물의 소식이라면 기러기는 하늘의 소식이니 하늘과 물을 이렇게 간결하게 새겨놓았다.




동춘당은 조선 효종때 대사헌,이조판서,병조판서를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의 별당이다.
현판은 송시열의 글씨다.


남쪽인 정면의 우측 창문과 좌측이 다르고 동쪽의 햇살이 들어오는 창은 창살이 윗칸만 있어서
아침에 햇볕이 직접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문을 나와 사랑채로 가니 어약해중선과 백세청풍이 보인다.

魚躍海中天은 바다에서 물고기가 뛰쳐올라 하늘로 오르다는 주희의 글이고,
백세청풍은 오래도록 부는 맑은 바람이라는 뜻이니

이는 "영원토록 변치 않는 맑고 높은 선비의 절개를 의미"한다.





○대전 계족산성(大田鷄足山城)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에 쌓은 백제시대의 테뫼형 산성(산 정상을 둘러 쌓은 성)으로 조선시대까지
사용.
사적 제355호. 백제시대 토기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의 옹산성(甕山城)으로 비정되며,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하기도 하였고,
조선 말기 동학 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고 전함.   




계족산성 아래 장동휴양림에서 부산에서 가져 온 금정막거리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였다.


이후 화페박물관에 둘러보았다.
입구 좌측에 붙어있는
"돈만 있으면 뭐든지 살 수있다.시간,인품,자유,침묵,영원한 생명,평화는 제외하고..."라는 
글귀가 이채롭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단재 신채호 생가였다.

세수 할때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고,집이 일본을 바라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서 북향으로 지었다는
패기는 
그가 얼마나 조선의 독립과 주인의식을 가지길 원했는지 모른다.


나는 우암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면 단재같은 사람이 있어서 나라를 구했다고 본다.

한밭골 위인들은 방향은 서로 달랐다고 해도 그들의 초지일관된 삶은 공통분모가 있다.


옳다고 생각한대로 거침없이 살다간 한밭골 위인들.
내눈엔 좌정관천으로 우암은 옹고집으로 살아갔고 단재는 담대한 패기로 살아갔다.

옹고집과 절개는 종이한장 차이다.


단재 생가 우측에 핀 금계국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잡힌다.

  

 ○ 신채호(申采浩 : 1880∼1936년)

고령(高靈) 신씨로 신숙주(申叔舟)의 후예. 조선말기∼일제강점기의 역사가․언론인․독립운동가.
호가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단재(丹齋)이고, 필명이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
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이며, 가명이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으며,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 어릴 때 한학을 배우고,
1905년 장지연(張志淵)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다가 이듬해 양기탁(梁起鐸)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항일언론운동을 전개.

1910년에는 만주 등지로 망명하여 민족해방운동을 전개. 저서로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등이 있으며,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상해로 가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
라는 의열단선언을 집필․발표.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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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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