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장엄한 일출과 함께 書.畵.歌.舞의 진도는 의미와 재미가 어우러진 작지만 큰곳이었다.

 

- 언제 : 2015.1.17  06:00~ 1.18 21:30
- 얼마나: 2015.1.17  12:00~1.18 17:20
- 날 씨 : 대체로 맑음
- 몇 명: 44명
- 어떻게 :고적답사회 동행/인솔:최영호 교수님



 부산→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녹우당)→ 대흥사 호남식당(점심)→ 대흥사→ 땅끝마을→  우수영성지→
명랑대첩지(이상 해남군)→ 진도대교→ 진도유스호스텔(저녁,울금막걸리,1박)


/진도유스호스텔(일출,아침)→ 신비의 바닷길→ 진도 아리랑체험관→ 남도진성(쌍운교,단운교)→
배중손사당→ 전 왕온묘→ 버섯마을(진도홍주,점심)→ 운림산방→ 용장산성,용장사→ 이충무공전첩비→
진도타워(이상 진도군)

 

 

전날 마신 울금막걸리가 숙면을 취하게 했는지 5시가 되자 완전히 잠에서 깨어 버렸다.일찍 샤워하고 여명을 기다린다.아니 이럴수가 지난밤에 도착하여 몰랐는데 여명이 밝아오며 살펴보니 이곳은 천혜의 일출명소다.유스호스텔 301호 방에 앉아서 초승달 아래 달마산 능선위로 붉은 기운이 퍼지고 그 아래 바다까지 볼 수 있다는 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니다.

 

나의 종교는 불교이지만 사실은 불교의 신앙적인 측면 보다는 불교의 철학적 부분에 가까운 풍류교(?)에 가깝다.태양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태양계에 살면서 태양계 비중의 98%를 차지하는 태양을 도외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특히 사진을 하면서 더욱 태양의 매력에 빠졌다.일출의 여명부터 내 가슴은 뛰기 시작한다.맨날 뜨는 해를 무어그리 집착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2015년 1월18일 이 아침은 당연한 말이지만 "내 인생에서 처음 경험하는 날"이다.

 

풍류산행은 "자연+예술+학습+인생"이 결합된 강호한국학으로 책만권을 읽어가는 독만권서(讀萬券書)와 만리여행을 하는 행만리로(行萬里路)의 세계이니  버스여행을 하면서도 책을 읽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오늘은 이판의 책으로는 "에디톨로지"를 읽었고 사판의 책으로는 "후강통 시대 지금 당장 중국본토 A주에 투자하라."를 읽었다.

 

이판과 사판이 경합할때는 사판이 우선이다.그도 그럴 것이 사판이 합리적인 판단이라면 이판은 신비적인 판단이다.사판의 기본은 이타행과 자리행이 동시에 이행되면 더할 나위없이 좋다.자리이타(自利利他)를 항상 염두에 두지만 인간 대부분은 내가 하는 일은 가장 힘든일이고 남이 하는 일은 가장 쉽게 보이는 일이니 자리이타가 조그마한 일을 지키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다.

나의 이런 이판과 사판이라는 생각을 다른 방편으로 생각해보면 "의미있음"과 "재미있음"을 구별하고 조화롭게 만든다.
자연+예술+학습+인생이 어우러져 의미와 재미를 느끼게 만드는 행위 중 가장 소홀하기 쉬운 분야가 예술인데 예술의 각론이 바로 "書.畵.歌.舞"이니 인생을 풍성하게 만드는 곳 중 진도만큼 매력적인 곳이 또 있을까?

 

 

(둘째날)

 

 

진도유스호스텔에서 여명을 바라본다.아직 초승달은 푸른 하늘에 떠 있고
길게 드리워진 해남의 주작산 달마산 위로 붉은 기운이 길게 드리워졌다.


 

시간이 지나자 구름까지 피빛으로 물든다.

굴 양식장 발들이 햇살에 비치며 빛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 순간 바다는 황금빛 엘도라도가 된다.

 

어찌 이런 장면을 보고도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진을 하다보면 빛에 민감해지고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숨은그림찾기도 잘 찾게 된다.
저 구름속의 작은 조막 무지개도 발견하는 자의 기쁨이다.

 

 

작은 배를 타고 바삐 굴 양식장으로 떠나는 어부(漁夫/漁父)를 보고
전일 고산의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떠오른다.


 

유스호스텔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오늘의 답사일정에 오른다.
가장 먼저 간 곳은 유스호스텔에서 가까운 "신비의 바닷길" 뽕 할머니와 호랑이 석상이 있는 곳이었다.

 

올해는 3월20일경 신비의 바닷길이 열린다고 한다.영등靈登사리에 2.8km구간이
한국에서 모세의 기적처럼 열리니 그 장관을 보고자 세계각지에서 관광객이 모여든다고 한다.

명승 제9호로 "전라남도 진도진도읍 성내리 64-1번지"로 현재 동상 뒤쪽 산쪽에
사시사철 그 장관을 보여주는 영상관이 지어지고 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진도 아리랑체험관을 갔다.진도는 서.화.가.무 부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곳이다.
진도 남도국악원 아래쪽 귀성(貴聲)마을에 위치하고 있다.귀성은 "귀한 소리"라는 의미이니
이곳에 아리랑체험관과 남도국악원이 생긴 것이 신기하다.

체험관내에서는 각 지역의 아리랑에 대한 내용들이 가득하였다.

 

 

 

다시 이동하여 남도진성과 해자 위로 쌍운교,단운교 작은 다리가 있는곳으로 갔다.
산성내로 들어가보니 민가철거작업이 진행중이었다.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문화유산해설사의 말을 들어보면 이미 백제 때 진도에는 3개의 마을이 있었고
그 중 한 마을의 중심지가 이곳으로 여겨지는데,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성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며 삼별초시대에 만든 성은 아니라고 한다.

 

 

 

 

 

○배중손(裵仲孫) 사당

삼별초항쟁을 이끈 배중손을 기리기 위해 그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배중손은 진도군 임회면
남동리에 있는 남도석성 전투에서 여원연합군에게 패한 후 굴포 해안 쪽으로 이동하다
최후를 마친 것으로 전하므로, 현재 배중손 사당이 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 굴포리에 위치.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임회면 굴포리 마을에는 당(堂)이 있어 매년 음력 정월 보름에는
농악을 연주하고 배중손 장군과 삼별초군, 고산 윤선도 제를 모시는 전통이 있었음.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당이 허물어져 방치해오다가, 굴포리 출신 동양화가
백포 곽남배가 주민 성금과 사비를 들여 현 위치에 사당과 신당비를 건립

 

 

배중손 사당은 배중손이 이곳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지는 역사 이외 별다른 볼거리는 없었다.
큰 소나무 한그루만이 쓸쓸하게 그 자리를 지켜주고 있는 모습이었다.

 

 

 

 

 

점심은 "버섯마을(전남 진도군 진도읍 동외리 1036-2)"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고
여기서 오랜만에 진도홍주(지초로 붉은빛을 낸 세계유일의 붉은 증류주)를 맛보았다.

7년전엔 진도홍주 명인 허화자 할머니의 술을 사갔는데 이번에 물어보니 2013년 6월12일
84세로 별세하셨다고 한다.

 

홍주를 볼때마다 어디서 본 고산자 김정호의 글이 떠오른다.

 

"홍매화에 떨어진 잔에 봄눈이 녹지 않았나 싶고,술잔에 비친 홍색은 꽃구경 할때 풍경이로다" 


식사 후 원래 답사계획에는 없었지만 문화유산해설사의 강력권유로 간곳이 운림산방이었다.
나는 이미 간곳이었지만 싫지는 않았다.그곳이 얼마나 좋은 곳인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첨찰산 아래 벌거벗은 배롱나무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연지는 5각형이다.4각형이었다면 중간에 배롱나무 때문에 곤할 곤(困)자가 되기 때문이다.

장시간 운림산방의 내력과 진도아리랑 노래까지 단체로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소치 허련 선생의 영정이 모셔진 운림사에는 그 유명한 추사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 ‘세한도(歲寒圖)’
목판이 걸려있다.그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을 찾아온 제자(우선 이상적)의 인품을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하여
그려준 것이다. 그가 중국에서 어렵게 책을 구해 보내오자 자신을 대하는 한결같은 제자의 마음에
고마워하며 보낸 글과 그림이라 한다.

 

완당 김정희의 세한도 우측 아래에 '장무상망(長毋相忘)'이라는 도서가 있다.의미는 '길이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인데 진도의 문화유산명해설사 도팍 이평기 선생으로 부터 들었다.

 

 

 

○진도삼별초항쟁

삼별초항쟁은 야별초(夜別抄)의 좌별초,우별초 및 신의군(神義軍)으로 구성된 삼별초가 배중손,
김통정 등의 주도로 원종 11년 6월 같은 왕 14년 2월까지 강화도,진도,제주도지역을 근거지로 삼으면서
출륙환도 및 삼별초의 해산명령 등에 반발하여 일어난 반정부,반몽투쟁.

삼별초는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을 새 국왕으로 추대하고 1270년 6월 강화경에서 봉기하였다가
곧이어 1,000여 척의 배로 진도로 이동. 진도의 거점 배경은 몽고군의 침입에 대한 수비의 유리한 점,
경상도,전라도지역 조운의 중요 길목이기 때문.

진도 용장성(龍藏城)을 거점으로 삼은 삼별초는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정부임을 자처하면서
황제국가를 표방하였으며, 합포(合浦 :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금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
동래,거제,남해,나주 등 경상도,전라도 연안지역과 밀양 등지 내륙까지 세력을 확대하는 한편,
제주도까지 확보하여 후방의 안정지대도 확보. 개경정부는 경상도,전라도의 조운이 차단되어 재정적으로
크게 타격을 입음. 그러다가 원종 12년 5월 여원엽합군이 진도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면서 삼별초가
크게 타격을 입고, 배중손과 승화후 왕온 등도 희생되었으며, 대부분의 사람들도 포로로 잡힌 채
일부만 김통정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이동.

제주도로 옮긴 삼별초항쟁군은 원종 14년 2월 병선 160척, 수군,육군 10,000명으로 구성된
대규모의 여원연합군에 의해 항파두리성에서 완전 진압.

 

 

 

진도의 용장(龍藏)산성의 이름은 "용을 감추었다"는 뜻인데 용은 임금을 의미한다.

 

용장사 내의 진도 용장사 석불좌상(珍島 龍蔣寺 石佛坐像)이 있는데 고려시대 작품이다.
옷주름이 인상적이다.

 

한때 행궁이었던 이곳은 현재 축대만이 남아 처절하게 파괴된 모습이다.

 

 

 

 

충무공벽파진전첩비[ 李忠公碧波津戰捷碑 ]

 

비문(碑文)은 노산 이은상(李殷相 1903~1982)이 짓고, 글씨는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소전 손재형(
孫在馨 1903~1981)이 썼다.

 

벽파진(
碧波津)은 명량해협의 길목으로, 진도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나루터이다.

이곳은 바위산 전체의 위쪽 통 바위를 그대로 깍아 거북이를 만든점이 특이하다.

 

손재형의 글씨는 중국의 서법이나 일본의 서도에 대바하여 서예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분으로
그의 글씨는 조형적으로 상당히 아름답다.말그대로 "글의 예술"이다.

 

 

 

 

진도타워로 와서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이순신 장군의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는 그 확신"을 느끼며 이틀간의 답사일정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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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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