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세월과 함께 역사가 되는데,켜켜히 쌓여진 그 기록들이 모두 지워지겠는가?

- 언제 : 2011.8.14(일) 14:00~2011.8.15 14:30
- 얼마나: 2011.8.15 07:00~10:00
- 날 씨 : 첫날은 비,둘째날은 흐림
- 몇 명: 가족동반
- 어떻게 : 자가 SUV이용
▷화양동계곡 야영장-화양동계곡-선유동계곡

 

주말마다 대우증권 과천연수원으로 연수를 받다보니 이번 여름은 정신없이 시간이 흐른다.그래서 휴가다운 휴가도 없었는데,연수일정 중 8월15일 광복절까지 연수일정에 넣기에는 부담스러웠던지 여하튼 오랫만에 연수일정에서 제외되어 휴식을 취하게 되었다.

 

토요일은 부부가 건강검진을 받고, 일요일 오후부터 시간이 나는 딸의 일정에 맞추어 드디어 1박2일의 짧은 휴가를 가게되었다.급작스런 일정에 가장 먼저 떠오른 곳이 괴산이었다. 화양동계곡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하루 야영을 하고,이튿날 화양동계곡과 선유동 계곡을 한꺼번에 둘러보는 일정을 염두에 두고 차를 몰았다.

 

가는 도중 차에 설치한 아이패드를 통하여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괴산에 도착해보니 수많은 인파로 인하여 북새통이었지만,다행히 텐트를 칠 곳을 마련하여 야영준비를 마쳤다.바로 그때 한줄기 소나기가 천둥을 동반하여 쏟아내리니 저녁은 간단하게 라면으로 대신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무래도 텐트는 불편한 잠자리이지만 가족이 함께 일정한 공간에 함께 누워자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경험이 된다.

 

 

밤새 간헐적으로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자고 일어나니
산은 온통 한폭의 동양화처럼 구름을 안고 있었다.오늘은 8월 15일 광복절이다.

 

먼저 화양동 계곡으로 향한다.주차장 못미처 제1곡 경천벽은 지나게 된다.주상절리된
바위처럼 수직을 마치 하늘을 받치고 있는듯이 보이는데 왼쪽 바위에 화양동의 입구임을
알리는 ‘화양동문(華陽洞門)’이라 쓰여진 바위글씨가 새겨져 있다.주차하기가 난감하여
그대로 통과한다.

 

화양동계곡은 우암 송시열과 관계가 깊은 곳이다.한국 역사상 가장 치열한 논란의 대상이며
조선왕조실록에서 3000번 이상 언급되는 조선 최대 당쟁가이며 그는 조선과 한국사에
비극을 잉태한인물이라는 평가도 있다.성인과 악마라는 극단적인 찬사와 저주가 함께 하는
송시열의 진정한 모습은 어떤 것일까?그를 존경하는 측에서는 송자(宋子)라는 경칭으로
부르고,반대하는 측에서는 송자(宋者)라는 별칭을 썼던 인물이다.조광조와 더불어 조선을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으로 송자대전宋子大全이라는 역사상 가장방대한 문집을
남겼다. 사약을 받고 죽었음에도 유교의 대가들만이 오른다는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전국 23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화양구곡의 명칭들도 우암이 지었다고 한다.우암은 일생동안 주자학적
명분론을 고수하며 절의를 중시한 인물이다.비례부동(非禮不動)이라
문자 그대로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다.화양동계곡은 세속과
멀리한다는 속리산 국립공원에 속한다.

 

우암은 그의 나이 53세이던 1659년에 함께 북벌을 꾀하던 효종이 갑자기
죽은 뒤부터, 효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현종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예송과 전통문제를 둘러싸고 남인과 극심한 붕당싸움을
하고 있었다. 우암은 복잡한 조정의 논의와 붕당싸움에서 벗어나 조용히 쉬면서
학문에 전념하고자 하였다.그래서 이곳은 우암의 얼과 혼이 스며있는 곳이다.

 

화양동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길로 들어서니 수림 울창하여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느티나무이다.괴산槐山의 괴槐는 홰나무
즉,느티나무를 의미한다.느티나무가 산만큼이나 많아서 지명조차 괴산이
된 것으로 보인다.조금 더 들어가니 운영담이 나온다.제2곡이다.구름그림자가
드리운다는 의미다.바위 아래에 운영담이라는 한자 글씨가 보인다.


 

화양서원에 다다랐다.우암 송시열을 모시는 최고의 서원이었고 노론의
학문적 기반이 된 곳이다.숙종의 사액賜額서원이다.만동묘도 함께 있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데 대한 보답으로 명나라 신종(神宗)
을 제사지내기 위해 만든 지은 사당이다.그래서 일제감점기 때 총독부가
강제로 철거한 곳이다.당연히 일본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때 많이 훼손되게 된다.담장 한쪽에 파손된 유물들이 보인다.

 

일본의 근성을 보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뜯어 고친다.광개토대왕비도
그랬고,실록과 일본 막부 기록에도 있는 독도를 수호한 안용복장군 조차
일본 극우는 그 흔적을 지우려고 난리다.교과서 마저 거짓으로 채우니
일본의 젊은이들은 진실조차 모르고 일본이 주도하는 거짓 역사에 놀아나
한국에 대하여 적개심을 심어 갈것이다.

 

차마 후손에게 거짓으로 속여 적개심을 가지게 하니 일본의 후손들에게
죄악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것이다.그들은 역사는 과학이 아니다라며
언제든지 고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단 한그루의 나무조차 오래되면 신목이
되고 역사가 되는 것을...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그들은 아직천황의
이름아래 민주적으로는 분명히 덜 진화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통감부 시절 힘없는 시절에 잠시 독도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주인 없는 땅을 차지했다고 강변하니..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면 진리가 된다고 믿는
영혼없는 사무라이의 후예들이여!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정신을
차릴것인가?

 

화양서원 바로 아래에 3곡 읍궁암이 있다.읍궁암 바로 앞에 비가 있다.
읍궁암비(泣弓巖碑)인데, 비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先生嘗於孝廟諱日 曉起痛哭於巖上 仍吟一絶 後人號其巖曰泣弓
盖取荊湖故事也 歲丁酉方伯尹公憲柱 謁廟訖大書泣弓三字刻石
視後其誠意至矣 尙夏謹書先生絶句於其末云 此日知何日 孤衷上帝臨
侵晨痛哭後 抱膝更長吟

 

우암선생께서 일찍이 효종의 휘일에 일어나 바위 위에서 통곡하고 일절을 읊었다.
뒷사람들이 그 바위를 불러 읍궁이라고 하였다. 대개 형호의 고사를 취한 것이다.
정유년 방백 윤헌주가 사당을 참배하고 ‘읍궁암’ 석자를 크게 써서 바위에 새기어
후세에 보이니, 그 진실한 뜻이 지극하다. 권상하가 삼가 선생의 절구를 그 말미에 쓰니,
“이 날이 무슨 날인지 아는가. 외로운 충정만 하늘에 닿았도다. 새벽이 되도록
통곡만 하다가, 또 다시 엎드려 무릎 끌어안고 탄식하노라” 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날은 "그것은 청나라의 무력침략으로 당한 굴욕적이고 치욕적인
국치를 설욕하기 위해 북벌을 꿈꾸었던 효종대왕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암 송시열은 효종의 제삿날인 5월 4일 새벽 읍궁암 위에 엎드려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일본은 읍궁암의 모든 글씨를 파내어 지급 읍궁암은 파여진 물웅덩이만 보인다.
저 웅덩이는 역사의 흔적이 아닌가? 그것조차 역사가 된다.

드디어 암서재가 나온다.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제4곡 금사담 위 바위
우암이 실제 살았던 공간이 나온다.비가 와서 아쉽지만 넘어가질 못했다.

 

우암이 화양동에 들어온지 3년이 지난 1669년경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시가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계변석애벽(溪邊石崖闢) 시냇가 바위 벼랑 펼쳐진 곳
작실어기간(作室於其間) 그 사이에 집을 지었노라.
정좌심경훈(靜坐尋經訓) 조용히 앉아 경전의 가르침 찾아
분촌욕제반(分寸欲躋攀) 시간을 아껴 높은 곳에도 오르리라.

 

산 아래 단아하게 앉아있는 듯한 암서재는 멋진 산수 속으로 들어 온듯한
착각에 빠진다.자세히 보니 忠孝節義(충효절의) 큰 글씨가 보이고 그 아래
바위에 글자를 지운 흔적이 역력하다.

 

이곳에도 괴산의 괴목,대단히 큰 느티나무는 여전하다.첨성대로 가는
다리 위에서 본 암서재는 자연과 일치된 모습이다.


 

첨성대는 제5곡이다.마주보는 구름을 물들인다는 의미의 채운사가
있다.길에서 삽살개를 데리고 나온 스님이 보인다.첨성대 바위에는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선조의 어필 글씨가 있다.

 

'강물이 일만 번을 꺾여 굽이쳐 흐르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 원래 뜻대로 되거나 충신의 절개는 꺾을 수 없음을 비유하는 고사성어이다.
그리고 제6곡 능운대라는 바위가 나오는데 아래서 보면 보잘 것 없는 모습이지만
위로 올라가면 넓고 평평한 모습이어서 그때 능운대의 진면목이 살아난다.
채운사로 오르면 보인다.수십명이 앉아서 시국을 논하고 풍류도 즐겼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들어가면 7곡 와룡암이다.글씨가 참 멋지다.
용이 누운 자리를 따라오르니 길과 마주하고 길 건너편에 바위가 이어진다.
그래서 웅장함이 많이 훼손되었는데 이때는 눈을 감고 상상을 해야
한다.제8곡 학소대까지 간 후 되돌아나왔다.9곡은 파천인데 한가지라도
남겨 놓아야 다음에 또 올것이 아닌가?

 

오늘 이곳 화양동계곡에서 만절필동萬折必東의 의미를 되새긴다.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역사의 기록속에 켜켜히 새겨진
모든 기록을 지울수는 없는 것이다.일본은 지금 자신들이 어떤 죄를 짓고
있는지 조차 모르는 것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모르고 지은 죄는
반성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차를 수배한 후 이번엔 선유동계곡으로 향했다.선유동계곡은 화양동계곡과 같은 계곡으로
이어져 있어서 풍광은 화양동계곡에 뒤지지 않는다.다만 이곳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仙과
유遊과 함께 있고, 역사적 의미는 화양동계곡에 못미친다.그래서 선유동의 구곡 중 일부만
사진으로 남긴다.


 

돌아오는 길에 송어회를 맛보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


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