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영천)문화적 전통이 담긴 군위 및 영천지역의 고적답사

 


- 언제 : 2013.6.2  06:00~22:00
- 얼마나: 2013.6.2  09:55 ~18:55
- 날 씨 : 맑음
- 몇 명: 40여명
- 어떻게 : 고적답사회 동행
▷대율리 전통마을(대율리 석불입상-중서당-남천고택)-군위 삼존석굴(모전석탑)-중식-
   인각사(학소대)-은해사-영천 청제비-임고서원

 

 

군위(軍威).지명이름이 "군대의 위엄"이라는 의미이니 뭔가 역사적 의미가 있을 것 같다.그 내막을 알아보니 지금부터 1300여 년전 신라무열왕때 김유신 장군이 정병 5만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기 위해 경주,영천,신령을 거쳐 군위에 진을 치고 하루를 유숙했는데 이곳에 온 군사들의 위세가 당당하다고 하여 이런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군위는 삼국유사의 고장이라고 한다.그 이유는 바로 인각사 때문이다.보각국존 일연이 우리민족의 기원을 밝히고 자부심을 일깨워준 삼국유사의 산실인 곳이다.고구려,백제,신라라는 나라로 쪼개져 있을때 단군이라는 하나의 뿌리를 일깨워 줌으로하여 한민족이 하나 될 수 있는 정신적 기초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고 생각한다.지금 남북한으로 갈라져 있는 현실에서도 남북이 하나 될 수있는 기틀은 아마도 단군의 자손이라는 점.아리랑이라는 노래.그리고 한글을 사용한다는 점일 것이다.

 

내 나이 20세때 기독교 종교를 가진 직장동료 중 여직원이 단군신화는 설화나 전설일 뿐이라며 폄하하며 오직 성경만이 위대하다고 나를 꼬드긴적 있지만 그 당시에도 내눈에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믿었다.삼국사기는 三國史記라고 하여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이다.그러나 삼국유사는 "삼국유史"라고 적지 않고 '삼국유事"라고 적는다.정확히는 三國遺事"이다.책명(冊名)이 말해 주듯이 일사유문적(逸事遺聞的) 기록이라서 잘 못 전해지는 부분도 있다.

 

정사正史가 아닌 야사野史이지만 정신사적인 면에서는 삼국사기를 뛰어넘는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그래서 민족사적인 면에서는 보전寶典이다.

 

그리고 이번에 군위와 영천을 답사하면서 아미타신앙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였다.우선 비로자나불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하면 "진리라는 것은 온 세상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의 의미이고,아미타불은 "이러한 진리를 깨우쳐 자신의 원에 따라 세상을 건설하신 부처님이 계시다."로 보시면 되고 미륵불은 "이런 부처님은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영원히 존재하시는데 그 미래불로 이런 세상을 용화세계라고 한다."로 정리 할 수 있겠다.

 

그 중 아미타라는 말은 무량수(無量壽), 혹은 무량광(無量光)을 해석되는데 한량이 없는 생명의 부처님, 혹은 한량없는 지혜광명의 부처님이라는 뜻이다.무량수전이나 극락보전이 있다면 아미타불이 계신다고 보면 된다.불교의 가르침은 크게 두가지로 하나는 석가모니가 직접 설하였던 부처님의 원음이라고 하는 아함경과 니까야에 전해지고 두번째는 부처님 열반 이후에 나타난 가르침인 대승불교이다.대승불교는 보살행을 통한 성불이라는 가르침으로 아미타불도 대승불교이다.

 

 

 

 

 

먼저 찾아간 곳은 한밤(대율大栗)마을이다.부림홍씨 집성촌으로 수백년된 전통가옥과
돌담이 예쁜마을이다.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온 것은 홍천뢰장군 추모비와 홍영섭 효자비도 있다.

 

 

 

 

 

 

마사토에 잘 자라는 호두나무와 산수유나무 아래 돌담들이 이어지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대율사 용화전에
보물 988호인
석불입상이 있다.용화전이라는 말만 들어도 미래불인 미륵불임을 알 수 있다.


수인은 여원인을 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여원인은 부처가 중생에게 사랑을 베풀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게 해준다는 덕을 표시하는 인상(印像)이다.

 

한마디로 "소원을 말해봐"라고 속삭이는 듯 하다. 

 

 

 

 

 

 

 

 

남천고택(상매댁) 옆 중서당이 보인다.맛배지붕 형식으로 대청마루가 시원하다.
장미꽃과 석단풍이 싱그럽게 덮힌 돌담을 경계로 남천고택이 있지만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했다.

 

 

 

 

 

 

 

 

 

 

팔공산 한티재를 넘어 삼존석굴이 있는 제2석굴암으로 간다.
사실 군위의 석굴암이 경주의 석굴암보다는 초기의 형태이고 시대도 1세기 앞서지만
발견이 두번째로 늦어 제2석굴암으로 불리는 곳이다.

 

삼존석굴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굴사원으로, 국보 제109호.
거대한 자연 암벽을 뚫어 조성한 석굴사원. 입구는 원형에 가깝고 내부 평면은 방형
(方形 : 네모반듯한 모양)이며 천장은 궁륭형(穹窿形 : 한 가운데가 제일 높고 주위가
차차 낮아진 하늘 모양). 독립된 삼존석상을 석굴 내부 벽면에 붙여서 안치.
우리나라의 석굴사원 대부분은 암벽에 마애불을 새기고,
그 위에 목조 전실(前室)을 세운 소규모의 석굴사원을 모방.
그런데 이 석굴은 자연 암벽을 뚫고 그 속에 불상을 안치한 본격적인 석굴사원.

 

 

아름드리 금강송 소나무가 멋진 곳을 거쳐 극락교를 지나니 비로자나불이 보이고
바로 우측에 모전석탑과 삼존석굴이 보인다.

 

망원렌즈로 당겨보니 본존은 석가여래 전통의 항마촉지인으로 우리나라 불상에서 발견되는 최초의 모습
이라고 한다.

 

이 수인은 석가모니가 수행을 방해하는 모든 악마를 항복시키고 성취한 정각(正覺)을,
지신(地神)이 증명하였음을 상징한다.

 

본존은 아미타불이고 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다.

 

문화해설사의 말로는 석청을 따러간 인근 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신문을 찾아보니 동국대 황수영 교수팀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삼존석굴 입구 주차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전골로 중식을 하였다.

입구의 작은 정원에 핀 꽃은 예뻤으나 식사는 한마디로 별로였다.
역시 나의 예상대로 경상도로 답사를 오면 먹는 재미는 일단 보류하고 오는 것이 맞다고 본다.

  

 

 

 

 

식사를 마친 후 드디어 군위의 자랑거리 인각사로 향하였다.

 

인각사(麟角寺)

신라시대의 창건 사원으로,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華山)에 위치한 사적 제374호.
사원의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기린이 뿔을 이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사원 이름을 인각사.

충렬왕 때 보각국존(普覺國尊) 일연(一然)이 임종할 때까지 삼국유사를 저술.
일연은 총림법회(叢林法會) 등 대규모의 불교행사를 개최.
보물 제428호로 지정된 보각국사정조지탑(普覺國師靜照之塔) 및 비 등이 현존.

 

 

문화유산해설사의 설명을 들은 후 한바퀴 경내를 돌아본다.

 

고은시인의 일연찬가가 보인다.

 

"오라 화산 기슭 인각사로 오라. 하늘아래 두갈래 세 갈래 찢어진 겨레 아니라

  오직 한 겨레임을 옛 조선 단군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한 나라였음을

  우리 자손만대에 소식 전한 그이 보각국존 일연선사를 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아 여든 살 그이 촛불밝혀 한자 한자 새겨간 그 찬란한 혼 만나 뵈러 여기 인각사로 오라"

 

인연찬가 속에 삼국유사의 값어치를 제대로 매겨 놓았음을 알 수 있다.

 

 

 

일연선사 생애관에 들어가니 유가사의 관기 도성 두분의 찬가가 보인다.
이부분이 삼국유사에 있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비슬산 유가사에 가면 큰 바위에 " 찬(讚)포산이성관기도성(包山二聖觀機道成)’이라는 시가 크게 적혀있는것을
여기에서 보니 반갑기 그지 없다. 시에서 두분 풍류의 주인공은 비슬산(포산)의 관기와 도성이다.

 

 

 

 

인각사의 중심건물은 대웅전이 아닌 극락전이었다.여기도 아미타 신앙이 중심이었다.

인각사의 극락전은 한창 단청 공사 중이었다.뒤로 가니 부도전을 비롯하여 깨어진 
보각국사탑비를 복원하여 복원비석이 서 있다.

 

극락전 앞에는 일연선사의 시비가 있다.

 

즐겁던 한 시절 자취없이 가버리고

시름에 묻힌 몸이 덧없이 늙었어라

한 끼 밥 짓는 동안 더 기다려 무엇하리

인간사 꿈결인줄 내 이제 알았노라

 

 

민족의 자주정신을 깨우쳐 주었던 역사의 현장치고는 너무나 초라하다.

한마디로 폐사지에서 약간 깨어나는 정도다.

 

구산문도회를 두번이나 열었다던 상상 속의 대가람은 어디가고 
인각사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성주괴공(成住壞空) 되었다 하더라도
인연선사의 그 깨우침은 통일된 미래를 위해서라도 온전히 계승되어야 한다.

 

 

 

 

인각사의 기린뿔과 연관성을 갖는 학소대(鶴巢臺)를 찾았다.감자꽃이 피어 있는 밭뒤로 학소대가 보인다.
그 앞은 내가 흐른다.

 

 

 

 

 

개인적으로 은해사는 예전에 한번 다녀간 적이 있다.

그때는 은해사와 백흥암.중앙암.묘봉암을 한바퀴 돌았다.(..more)

 

 

은해사(銀海寺)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淸通面) 팔공산(八公山)에 위치한 아미타불의 미타도량 사원으로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惠哲國師)가 해안평(海眼坪)에 창건하여 해안사(海眼寺)라고 하다가
원종 5년(1264) 홍진국사(弘眞國師)가 중창․확장. 인종 1년(1545)에 소실되어 명종 1년(1546)에
천교(天敎)가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음. 법당과 비석을 세워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라 함.
국보 제14호인 거조암영산전(居祖庵靈山殿),
보물 제486호인 백흥암극락전수미단(百興庵極樂殿須彌壇 :
수미단은 법당 정면에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던 대좌),
보물 제514호인 운부암청동보살좌상(雲浮庵靑銅菩薩坐像), 보물 제790호인 백흥암 극락전,
보물 제1270호
괘불탱 등이 현존. 대웅전과 보화루, 백흥암 등의 현판 글씨가
모두 조선시대 명필 추사 김정희의 친필.

 

 

그때 이미 은해사의 의미도 알았다.

은해銀海사...은빛이 바다라는 의미다.

신라의 진표율사도

"한 길 은색 세계가 마치 바다처럼 겹겹이 펼쳐져 있다."고 했다.
一道銀色世界 如海重重

 

성보박물관에 들어가니 완당 김정희의 불광佛光이라는 편액 글씨가 보였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온통 일타스님의 흔적들이 보이는 절이다.

 

은해사 입구의 소나무들도 무척 절집다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부도밭으로 떨어지는 사광이 뭔가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려오는 느낌이다.

 

 

 

 

 

500년된 향나무를 지나 지장전으로 가니 담벼락의 꽃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장전 뒤의 산령각은 인각사의 산령각처럼 절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예경을 해야하는 구조로

상당히 작다.그래서 예쁘다.

 

그러고 보니 부산의 사찰과 이곳 군위와 영천의 사찰과의 차이점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아미타 신앙이 자리잡고 있고,두번째로 산령각의 규모가 작다.

산령각의 산신은 부산은 할머니라면 이곳은 할아버지이다.

 

대승불교 아미타신앙.군위라는 남성적 이름.작은 산령각과 그 속의 할아버지.
보수성향의 지역민들...

 

군대는 가장 보수적인 곳이고 군대에서 바로 죽을 수도 있는 입장에서
나무아미타불만 암송하면 극락에 갈 수있다고 했을때 상당히 현실적인(?) 부처님이다.

 

 

 

 

 

 

 

 

일타스님의 일주문 글씨 이후 지장전 글씨를 보노라면 얼마나 빠른 붓놀림인지를 알 수 있다.

일필휘지 단숨에 쓰갈긴 듯한 글씨를 보고 있으니 글씨에도 일가견이 계신 포운스님이 한 말씀하신다.

 

"광초光草다."

 

초서체 중에서도 빛만큼 빠른 글씨체라는 의미다.

특히 지장전地藏殿의 장藏자 글씨는 압권이다.

 

은해사 극락보전의 팔작지붕은 한껏 팔공산 자락에 맞추어 봉황이 날깨를 펴듯 하늘로 솟구쳐있다.

다포양식 건축물로 대량위의 충량머리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였다.

 

극락보전 안의 괘불탱도 볼만하다.

 

전체높이 11.56m로 아미타여래상으로서 화려하면서도 기품있는 모습이 눈에 뛴다.
모란과 극락조의 모습도 뒤의 배경그림으로 보인다.

 

 

 

 

 

 

 

 

인상 좋은 웃음이 멋진 교수님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주차장 근처 가게로 와서
팔공산 갓바위주 막걸리를 마신 후 청제로 향한다. 

 

우선 청제(菁堤)로 올라보니 한가로이 강태공들이 낚시에 열중이다.

 

청제의 청菁 글자는 부추꽃 청이다.

청제비는 제방 아래 길건너편에 있다.

 

 

영천 청제비(菁堤碑)

 

보물 제517호.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에 있는 신라시대 비석으로, 병진년(법흥왕 23년, 532)명.
정원 14년(원성왕 14년, 798)명 비석. 영천 청못(菁池)의 축조와 중수에 관한 내용을 기록.
두 개의 비 가운데 흔히 청제비(菁堤碑)라는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음.
병진년의 명문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 때, 반대 면의 정원 14년의 명문은 청못을 새로 수리할 때
각각 새긴 내용.

병진년 비문의 내용은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의 명칭, 공사의 규모, 동원된 인원 수, 청못의 면적,
청못으로 인해 혜택 받을 수 있는 농지 면적, 공사를 담당한 인물의 이름 등, 정원 14년명
비문의 내용은 청못의 수리가 완료된 연월일, 비문의 표제, 파손․수리 경위, 수리한 둑의 규모,
수리 기간, 공사에 동원된 인원 수, 관계 담당관의 이름 등으로 각각 기록.

 

영천청제비는 신라 수리시설의 실태, 통일신라시대의 중앙 집권 체제와 역역 동원관련 등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원천자료.

당시 절화군(切火郡)인 영천은 왕실 직할지로 존재.

청제비 바로 옆에는 숙종 14(1688)에 세운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가 존재. 원래 청제비에서
서쪽으로 5m 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청제비와 나란히 비각 안에 위치.

 

 

 

 

 

 

마지막은 임고서원이었다.

 

임고서원(臨皐書院)

 

경상북도 기념물 제62호. 고려말 충신이자 성리학자인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의 고향에 세운 서원. 조선 명종 8년(1553) 임고면 고천동 부래산에 건립하였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에 중건되어 사액서원.
정몽주 영정 2폭과 유허비, 보물 제1109호로 지정된 10권 5책의 전적 및 포은집(圃隱集)․
지봉유설(芝峰類說) 등이 소장.

 

 

포은 정몽주의 충忠을 그대로 재현해 보여주는 느낌이다.

교수님은 컨텐츠의 중요함을 일깨워주신다.

 

정몽주라는 컨텐츠는 이곳 영천시.후학.가문의 진격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있다.

 

한눈에도 상당히 많은 돈이 들어갔음을 알 수있다.

 

450여년의 은행나무가 보인다.행단이 떠오른다.행단杏檀은 공자가 은행나무 단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그래서 행단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의미도 된다.

 

 

 

 

동방이학지조 승탑비는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겼다.

 

여말(麗末) 당시 목은 이색선생은 자주 말하기를 달가(達可: 포은의 자)가 이(理)를 논(論)함은
횡설수설(橫說竪說:
조리가 없이 되는대로 말을 지껄임)이 이치에 맞지 않음이 없다고 하여 동방이학지조라고

하였는데 동방이학지조는 공교롭게도 이색의 평가이므로 그런 평가를 할 수 있는 것은 스승의 입장이니
이색 또한
동방이학지조를 넘어선다고 볼 수있다.

 

우리가 보통 고려 삼은이라고 하면 고려 말의 학자이며 문장가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두고 이르는 말이니 끝까지 고려를 사랑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은행나무 앞의 정몽주 자당(어머니)의 백로가와 포은의 단심가는 그 가풍을 익히 알 수 있고,

승탑비 뒤에는 숙종,영조,고종의 칭송시도 볼만하다.

 

그중 숙종의 어필을 보면

 

 

숙종대왕 어필

 

절의천추고(節義千秋高 절의가 처추에 높으니) 평생아경중(平生我敬重 평생에 내가 존중하도다)

열조누포승((烈祖屢褒崇 열조께서 여러번 포승하였거니와) 사림숙부용(士林孰不聳 사림의 누구인들 높이지
않으리오)

 

영조대왕(英祖大王, 1694∼1776)  어필

 

도덕정충긍만고(道德精忠亘萬古 : 도덕과 정충이 만고에 뻗치니)  

태산고절포은공(泰山高節圃隱公 : 태산같은 고절의 포은공일세.) 

 

 

고종황제(高宗皇帝, 1852~1919) 어필

 

위충대절광우주(危忠大節光宇宙 : 높은 충성 큰 절의가 우주에 빛나니)

오도동방뢰유공(吾道東方賴有公 : 동방의 오도는 공에게 힘입었네.)

 

해설사님의 충과 임에 대해서 정몽주의 풀이를 말씀해주셨다.

 

 

임향한 일편단심에서 임은 고려와 임금도 되지만 바로 그 자신도 된다는 풀이가 뜻 깊었다. 

 

교수님은 추가 설명으로 부연해주었는데 같은 논리의 이재운 소설가의 칼럼을 보게되어

생각이 넓어졌다.

 

" 정몽주는 선지교 사건 이후 오래도록 간신역적으로 남아 있다가 그에게 살인명령을 내린
이방원에 의해 갑자기 신원되면서 충신으로 돌변했다. 그가 죽은 선지교는 선죽교로 바뀌고,
붉은색을 띠는 축석은 정몽주의 피가 묻은 돌로 꾸며지는 등 꾸준한 스토리텔링이 입혀지고,
무엇보다 간신 역적이라며 쉬쉬하던 그를 성리학의 대가이자 충절의 상징이라며
서원 13개가 나서서 제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사실 이성계의 쿠데타 동지이자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이방원의 고육지책이었다.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 개국의 유일무이한 일등공신이자
조선국을 설계한 국부(國父)지만 이방원에게는 한낱 정적일 뿐이고,
비록 자신이 간신 역적이라고 규정한 정몽주라도 정도전의 신권을 억누를 수 있는
유일한 카드였다.

 
즉 신하는 신하일 뿐 오로지 국왕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태조 이성계가 인정한 충신 정도전은 이방원에 의해서 노비 출신의 간신이 되고
이방원 자신이 규정한 간신  정몽주는 충신이 된다. 독재자도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만의 제왕학 중에 아마도 아웃포커스 기법이 전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몽주가 낚시를 했다는 조옹대에서 임고서원을 바라보니 상당히 규모가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 컨텐츠의 위대함이여.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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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Posted by 세벗 트랙백 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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