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일원)그러니까 결국 조선은 백제가 다시 살아난 것인지도 몰라 (2/2)



- 언제 : 2013.1.19 06:00~1.20 20:00

- 얼마나: 2013.1.19 09:30~1.20 17:30
- 날 씨 : 흐림
- 몇 명: 46여명
- 어떻게 : 부산고적답사회 동행 
-가져간 책:
            사진으로 만나는 인문학
            소울 포토(상상을 담는 창의적 사진 강의 노트)
            활을 쏘다.고요함의 동학動學,국궁

▷부산-마이산휴게소-벽골제수리민속유물전시관-벽골제-금산사(김제)-남고산성-전주명가(막걸리집)
   -전주관광호텔(1박)-동고산성-전주역사박물관-전동성당-승광제-경기전-전주사고-어진박물관-
   풍남문-전주객사-마이산 휴게소-부산

 

 

 

943년 고려 태조가 세상을 떠날 무렵 박술희에게 전하여 후세에 왕들에게 경계로 남긴 글이라고 한것이 훈요십조訓要十條이다.≪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전문이 전한다. 원본은 병란 통에 분실되었다가 최승로의 손자 제안(齊顔)이 최항(崔沆)의 집에서 원본을 구했다는 사실로 인하여 최항 혹은 최제안이 위작했을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었으나 대체로는 왕건 자신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문제는 8조 부분이다.특정지역의 정치참여제한인데 차령산맥 이남 금강 이외의 산형지세는 거꾸로 배치되었으니 그 지방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부분이다.

 

"其八曰: 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趨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統合之怨犯生亂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變者必有之矣. 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

 

8조는, 차현(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하니 인심 역시 그러하다. 그 아래의 주ㆍ군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ㆍ국척과 혼인하여 나라의 정권을 잡게 되면, 국가를 변란하게 하거나 백제가 통합당한 원망을 품고 임금의 거둥하는 길을 범하여 난리를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찍이 관청의 노비와 진(津)ㆍ역(驛)의 잡척(雜尺)에 속했던 무리들이 권세 있는 사람에게 의탁하여 신역을 면하거나 왕후나 궁원에 붙어 말을 간사하고 교묘하게 하여 권세를 부리고 정치를 어지럽혀서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그 선량한 백성일지라도 벼슬 자리에 두어 권세를 부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

 

여러가지를 감안하면 위작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위작의 진위여부는 알수 없으나  금강의 모습이 개경을 향해 활을 힘껏 당긴 만작의 모습이라는 설이 눈에 띄인다.해석을 어떻게 하든 백제사람 전주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는 부분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성계의 가계가 역사상 확실하게 나타나는 것은 1170년(의종 24)경부터디.이때 무신란을 주도한 이의방의 동생 "이인"이 이색이 지은 이자춘신도비(李子春神道碑)에 나오는 이성계의 6대조인 것으로 나온다.그 기록으로 보아 전주이씨 일족은 적어도 무신란 직전부터 무반직에 올라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그 뒤 이인은 1174년(명종 4)에 이의방이 피살되자 낙향하였는데, 그의 손자 안사에 이르러 역사적 인물로 뚜렷하게 부각된다.

 

이성계하면 활쏘기의 달인이 아닌가? 이성계의 부친과 그 할아버지도 "조선의 궁술"이라는 책에 보면 활 잘 쏘는 선사였다고 한다.한마디로 집안 내력인 셈인데 태조 이성계 이후 활을 잘 쏜 군주는 태종과 세조 그리고 정조가 있다.특히 정조는 신궁의 반열인 극강의 실력이다.요즘으로 치면 10단에 해당하는 실력을 가진 군주였다.

 

 

 

 

 

막걸리 파티였지만 머리가 아픈 숙취 증세는 없다.
교수님은 아직 한밤 중인데 포운스님은 새벽 5시에 기상하여 채근한다.

식사시간은 7시 30분 부터이건만...
덕분에 샤워하고 느긋하게 TV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전일 마신 술기운 때문인지 그다지 컨디션이 좋다고 할수는 없는데,아침부터 산을 오른다.
견훤왕궁지이다.
힘들게 올라 동고산성 북문터까지 올랐지만 볼것이 별로없다.
철저하게 파괴된 것이다.

 

신라의 왕궁터 반월성에 올라보면 신라의 왕궁터도 마찬가지다.
동고산성의 일부 흔적과 깨어진 기와 몇점 정도 외에는 아픈 다리의 통증만 남는다.

 

동고산성/전북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산25번지

 

 

 


 

 

 

 

 

 

전주역사박물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2가 892-1

 

전주의 유명한 한지로 전주의 지형을 형상화 해놓은 조형물이 보기 좋다.

박물관의 조형 중에 동고산성 북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를 보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었던 황실 사람들의
이름들이 어디에 있는지 파악이 된다.먼저 명성황후가 보이고
항문이 막혀(항문폐쇄증) 배설을 하지 못해 죽은 원자가 보인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보내 준 산삼의 열로 아이가 죽은 것으로 알고
대원군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순종 이척은 자손이 없고,명성황후 아래 영친왕,이방자,그리고 그 아래 이구

영보당 귀인 이씨 아래 13남 9녀 중에 이석이 보인다.오늘 그분을 만난다. 

아래쪽에 덕혜옹주도 보인다.그런데 전반적으로 조졸(早卒)이 많이 보인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어려서 죽은 사람이 많은지 모르겠다.
황실이 이정도라면 그 당시 일반 백성들은 얼마나 많이 죽었을까?

 

 

 

창암 이삼만의 산광수색의 필법은 흉내내기도 쉽지 않다.뱀의 형상 그대로이다.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흉상이 보인다.일본이 절두해간 해골을 가지고 복원한 것이다.

 

 

 

 

이미 어린이 탐방객들은 역사보다는 스마트폰의 게임기에 빠졌고,
다리가 아파서 주저 않아 쉬는 이도 있다.

 

 

 

 

 

 

 

 

 

1970년에 설립된 종로회관에서 놋그릇에 담긴 전통 전주비빔밥을 먹은 후 전동성당으로 갔다. 

 

전동성당/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200-1

 

서울 명동성당과 같은 로마네스크 양식건축물이다.원래 전라감영이 있던 자리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순교자가 나온 곳이다.

 

 

○전주전동성당(全州殿洞聖堂 : 사적 제288호)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있는 천주교 성당으로
                                               1914년 벽돌로 준공된 로마네스크양식

 

 

 

 

 

 

황실의 후손인 이석을 만나기 위해 승광재承光齊로 간다."빛을 계승한다"는 의미이니 조선과 대한제국의
영광을 이어가겠다는 의미로 보인다.

 

황실 후손 이석은 황실복원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고 그의 노래 "비둘기집"을 불러주었다.

 

 

 

 

 

 

 

 

한옥마을 꽃담이 아름답다.

 

 

 

 

 

드디어 경기전으로 갔다.

 

 

경기전/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3가 102

 

○경기전(慶基殿 : 사적 제339호)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묘사(廟祠)로
태종 10년(1410)에 건립. 태종은 어용전(御容殿)이라는 이름으로 완산(지금의 전주시)․
계림(지금의 경주시)․평양 등 3곳에 창건하여 부왕인 태조의 어진(御眞)을 봉안.
세종 24년(1442)에는 그 소재지마다 이름을 달리하여 전주는 경기전,
경주가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종전이라 부름. 경기전은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광해군 6년(1614)에 중건.

 

 

눈이 녹아서 웅덩이가 된 곳이 보인다.문화유산해설사의 목소리를 듣고자
모두 경청에 여념이 없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은 9개(조선시대가 9개 중 6개)로 세계 6위,
아시아 1위로 중국은 5개,일본은 아예 없다고 한다.

 

 

 

 

 

 

 

 

 

 

 

 

 

전주사고/경기전 내에 있다.

 

 

 

어진박물관/경기전 내에 있다.

 

 

조선시대 왕들의 영정을 모셔 놓은 박물관이다.
태조 이성계는 푸른 용포를 입었고 고종은 황제로 황룡포를 입었다.

왕의 영정을 어진이라고 하는데 어진 중에서
정조의 어진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신궁 정조에 대한 내력을 알아본다.

정조 36권, 16년(1792 임자 / 청 건륭(乾隆) 57년) 10월 30일(을미) 6번째기사를 보면,

 

춘당대에서 활쏘기를 하여 10순에 49발을 맞혔다. 또 작은 과녁은 1순 전부를 모두 맞히고 각신들게 고풍(古風)을 내렸다.
그리고 뒤이어 여러 신료들과 연구시(聯句詩)를 지었다. 전교하기를,


 

“우리 성조(聖祖)께서는 하늘이 내신 뛰어난 무예로 활 쏘시는 솜씨가 신비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난을 일으키는
무리들을 모조리 제거하고 백 번 싸워 대업을 이룩하셨다. 그 활과 화살이 지금도 풍패(豊沛)의 옛 궁에 간직되어 있다.

우리 모든 신하와 백성들은 그것을 마치 한(漢)나라 고조가 뱀을 베어버린 검과 같이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그 얼마나 훌륭한가.
그로부터 성스럽고 거룩한 임금이 대를 이어 오면서 선업을 더욱 빛내고 백성들에게 흡족한 덕을 베풀었기에 문치(文治)의
아름다움이 삼대(三代)에 비길 만하였다. 그러나 사예(射藝)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때는 없었던 것이다.

역사와 야승(野乘)에 분명하게 적혀 있는 것들은 그만두고라도 궁중에 전해 내려 오는 얘기들과 또는 내가 직접 보고 아는 것만
하더라도 활 쏘는 기법의 신묘함이 보통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활 쏘는 것이 사실 우리 왕조의 가법(家法)인 것이다."

 

라고 하여 활쏘기의 내력이 왕조의 가법이라고 했다. 

이성계의 활쏘기 일화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성계는 활로 조선을 세웠다고 해도 무방한 군주였다.

말년엔 "함흥차사"라는 신조어도 만들어냈다.
 

전주대사습놀이가 있다.지금은 대사습大私習이라고 쓰고 판소리 위주로 꾸며지지만
원래는 대사습大射習이었다.말타고 활쏘기 대회의 일종이었다.

 

말타고 활쏘기 대회에서 출발하여 영조무렵 물놀이가 추가되었고 철종 무렵 여러가지 놀이와
판소리 경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와 같은 대사습놀이는 한말 이후 중단되었다가 1975년 전북 지방 유지들의 힘으로
70여년만에 부활되었다.

 

 

 

 

 

 

풍남문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 83-4

 

전주읍성의 남문이다.조선시대의 성문으로 수원의 팔달문과 서울의 광화문과 흡사하다.
전주는 풍패지향(豊沛之鄕 : 중국 패주 풍읍 출신으로 황제가 된 한나라 고조의 유사에서
유래한 의미로 국왕의 고향)으로 조선왕실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그래서 풍패지향의 남쪽문이라는 의미로 풍남문이다.

 

 

○풍남문(豊南門 : 보물 제308호)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문(城門)으로
전주부성(全州府城) 4대문 가운데 남문(南門)이며, 이미 고려 말 도관찰사(都觀察使) 최유경(崔有慶)이 축성.

 

 

 

 

 

전주에서의 마지막 탐방은 전주객사이다.

 

전주객사/전북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 3가  

 

풍패지향의 관이라는 의미로 풍패지관豊沛之館 현판이 보인다.
객사는 객관이라고도 하며, 고려 · 조선 시대에 왕명으로 벼슬아치들을 접대하고 묶게 한
일종의 관사를 말한다. 감실에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망궐례인 임금에 대해 예를 올렸다.

 

○전주객사(보물 제583호)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중앙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건축물.
전주사고(全州史庫)를 건축할 때 남은 재료로 성종 4년(1473)에 서익헌(西翼軒)을 개축.

 

 

 

 

 

이틀간의 강행군으로 지친몸으로 자다 일어나니 다시 마이산이 보인다.
아름다운 저녁놀은 관심이 없는지 휴게소 근처 쉴자리에서
교수님을 비롯하여 일행은 마지막 막걸리 파티 중이다. 

 

나는 취기가 아닌 회광반조 석양빛으로 내 얼굴 가득히 홍조로 물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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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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