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맷길.금강공원 문화유적 탐방길)본디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빛을 발한다.

- 언제 : 2012.1.29(일) 09:45~14:30
- 얼마나: 2012.1.29 10:40~13:50
- 날 씨 : 맑음
- 몇 명: 홀로
- 어떻게 : 자가SUV 이용
▷개성고-금강사-금정다전-금강공원 독진대아문-이섭교비-내주축성비-금강연못-금강원지
-소림사-부산민속예술관-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깨진바위-동래임진의총-고려5층석탑-망미루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정의 중 가장 좋아하는 문구는 이렇다.

 

"여행은 먼 곳에만 있지 않다. 여행은 더러 먼 곳을 향하여 뻗어간 시선을 자기 안으로 거두어들일 때 비로소 예상치 못한 진경을 보여준다. 여행이 공간의 확장을 통한 자기 내면의 성찰에 있는 것이라면, 그 역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내가 생각하는 여행은 공간의 축소를 통한 자기 내면의 확대에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땅을 꼼꼼히 들여다보고, 무심히 스쳐지나갔던 일상의 자잘한 풍경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나의 생은 모자라는 것이 아닐까."

 

최근 유가가 올라 교통비도 부담스럽다면 가까운 유적을 찾아보는 것도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부산의 트레일 이름인 갈맷길은 바다와 꼭 인접한 코스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부산의 트레일 코스라면 모두 갈맷길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오늘 가는 코스는 갈맷길 중 "금강공원 문화유적 탐방길"이다.

 

금강공원園이라는 이름은 부산의 명산인 금정산 능선의 남쪽 끝에 있는데,우거진 노송과 기암괴석 및 깍아세운 절벽 등 산세의 수려함이 작은 금강산과 흡사하다하여 신라때부터 소금강이라 불린데서 유래한다.공원 안에는 밀도 있게 시설들이 들어 차있으며 볼 만한 문화유적도 다수가 있다.

 

온천장역에 차를 주차해 놓고 내가 예상치 못했던 볼거리와 마주하기를 내심 기대하며 무작정 금정산 방향으로 올라갔다.이렇게 오르면 내가 부산이라는 익숙한 곳을 마치 미로처럼 바꾸어 놓는 마술적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틀전 고등학교 친구들과 이벤트로 족구시합을 예정되어 일단 만남장소인 개성고 학교로 갔다.
그런데 위아래 서너개로 산개되어 있는 넓은 운동장을 뒤졌지만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다.

 


혹시 약속일이 바로 전날이었는지 의심이 든다.전화를 해보려는데 휴대폰조차 챙겨오지 않아서
포기하고 그대로 온천장역으로 향한다.



 

온천장역에 주차를 하고 육교를 건너 금정산 방향으로 동래온천을 가르며
좌충우돌하며 오르니 금정산 금강사가 보인다.

 


위치는 금강공원 공영주차장 가까이 있고,앞은 동래온천이 있고 뒤편은 금정산이며
금강공원 바로 옆이다.

 

금강사(金剛寺)는 부산시 동래구 온천동 1번지에 소재한 전통 사찰로 소개되어 있지만
동래온천처럼 약간 일본풍의 느낌이 나는 곳이다.우선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면
일반적인 풍경보다는훨씬큰종이 걸려있는 모습과 석축 모서리부분이 일본 성곽과
유사하다.


 

안으로 들어가니 우람한 대웅보전의 화려한 문창살이 압권이다.
얼핏보면 흡사 심장생도 같은 그림이 보이는데 자세히 보면 섬세하기 이를데 없다.
또한 큰종이 있는데 크기가 만만찮은 크기다.

 

대웅전을 돌아 사찰 뒤편으로 가면 차밭골의 지명 유래가 된 금정다전金井茶田이 있다.
그 뒤쪽은 민간신앙의 흔적도 볼 수 있다.다만 차밭관리가 좀 부실하다는 느낌이다.

 

금강사 사찰의 특이한 점은 금정산주산신령각(고당선랑각)인데,마을 사람들이 당산을 모우고
산신재를 지내며 정갈한 사람으로 재관을 삼고 매년 정월 보름날 자정에 헌공하며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음복한다고 한다.

 

금정산주산신령각의 헌다례 차밭골이 있는 금강사선다회에서는 매년 한번씩 차밭골 햇차를
준비하고 주산신님과 고당선랑에게, 금강다정에 감로수와 금강다전의 차밭골에 내려준
신령한 차나무 잎으로 만든 차를 타서 더욱 영물로 만들어 치성을 올리고 기원하면서
다례 의례를 행한다고 한다.


 

금강사를 둘러보고 나와 드디어 금강공원으로 들어간다.
안으로 들어간 후 좌측길을 따르니 동래 독진대아문門이 나온다.


 

독진대아문 좌측의 큰 바위는 말바우(말바위)로 옛날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이 바위에 걸터 앉으면 아기를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인근에 말바위와 연계된
마암馬巖마을이 있다.

 


독진대아문은 조선시대 관아 대문인데,원래 동래부사청 동헌(東萊府使廳東軒) 앞 대문으로
망미루 뒤쪽에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리에 따라 지금의 온천동 금강공원으로
옮겼다고 한다.

 

양쪽 기둥 왼쪽에는 '진변병마절제영(鎭邊兵馬節制營 :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의 영)',
오른쪽에는 '교린연향선위사(交隣宴餉宣慰司 : 대일외교에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관청)'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독진대아문 안으로 들어가니 이섭교비利涉橋碑가 있다.
이섭교는 지금의 동래구 수안동과 연산동 사이에 있는 수영천(水營川)에 놓았던 3개의
아치로 연결된 돌다리라고 한다.

 

비문에는 ‘옷을 걷어 올리고 건너다니던 냇물에 나무다리를 놓아 냇물을 편히 건너다니게
되었지만, 나무가 쉬 썩어 해마다 다리를 고쳐야 하는 폐단이 있었다. 1694년 겨울에 몇 사람이
뜻을 모아 돌다리를 놓기로 하고 중을 모으고 다리건설에 드는 돈을 모아서, 이듬해 1695년 봄에
백성들이 거들어 다리를 놓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러니 이섭교는 이섭교비 바로 앞의 자연돌다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내주축성비碑가연이어 나타난다.


 

조선 영조 7년(1731) 동래부사(東萊府使) 정언섭(鄭彦燮)이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동래읍성을 대대적으로 수축한 사실을 칭송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신해년(辛亥年:1731) 1월에 성터를 측량하기 시작하여 4월에 성벽을,
5월에 성문을, 7월에는 문루(門樓)를 완성하였는데, 경상도 64개군에서 5만 2,000여명의
장정을 동원하였으며, 쌀 4,500여 섬과 베 1,550필, 1만 3,400여 냥어치의 재물이
소모되었다고 한다.

 

비석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대석은 복련(覆蓮)으로 장식했다.


 

연이어지는 기암괴석과 풍광에 눈이 휘둥그래진다.
금강연못 중간에 돌다리도 예쁘다.


 

금강연못 뒤로 가면 갑자기 경사가 가파라지는 곳에 금강원지가 있다.
슬픈역사도 우리의 역사라면 감추어 버리는 것보다 안고 가야 할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거대한 비의 내력을 알고나면 시민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 같다.

 

화강암에 카타카나와 한자로 소화6년(1931)부터 부산의 "히가시하라 카지로"라는 사람이
소유한 동산과 연못을 개방하였고 황기 2600년에 동래읍에 기증했다는 사실과 읍에서
이것을 칭찬하여 유래를 새겨서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원(금강원)은 금정 연봉 남쪽 끝나는 곳에 있으며 산을 업고 골짜기를 안으며
기암이 누적하고 취송이 울창하여 별천지에 노니는 것 같도다"라는 표현도 보인다.


 

더 이상 오르면 피가 거꾸로 돌 것 같고,어차피 등산보다는 갈맷길이라는 트레일이므로
여기서 내려온다.용추연못을 지나며 울창한 나무숲이 다시 안정을 찾게 한다.

 

입구 석축의 모서리가 역시 일본풍이다.대웅전의 벽은 화강암 석재로 되어있는 점이 특이하고
문창살의 문양은 볼만하다.


 

소림사에서 조금 더 내려오니 부산민속예술관이 있다.학춤을 표현한 비와 아래는
예능보유자의 이름이 보인다.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으로 내려오니 놀라운 볼거리가 두개 더 있다.

 


흡사 승천하는 용의 모습을 한 소나무가 보인다.그냥 어쩐지 하늘을
보고 싶어서 고개를 들었더니 이 소나무가 눈에 들어 온 것이다.

 

그 시선을 그대로 땅으로 내려보니 바위를 깬 소나무가 거짓말 처럼
보인다.단단하고 강인한생명력이 부산의 민초를 닮았다.


 

동래임진의총이 보인다.문안으로 들어가보니 선정공덕비가 줄지어 서있고,
둥근 수문이 인상적인 계곡의 담장옆문으로들어가니정언섭부사가쓴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의 비가 있다.

 

임진왜란 때 왜의 침략으로부터 동래성(東萊城)을 지키기 위하여,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1551~1592)과
함께 궐기하여 싸우다 순절한 군·관·민의 유해를 거두어 만든 무덤이다.1731년(영조 7) 동래부사 정언섭이
허물어진 동래읍성을 수축할 때, 임진왜란의 격전지였던 옛 남문터(구 대동병원 부근)에서 당시 전사한
많은 무명용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이 유해를 거두어 함에 넣어 삼성대(三姓臺)의 서쪽 산기슭
(현 내성중학교 부근)에 여섯 기의 분묘를 만들어 안장하고, 그 앞에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이란 비를 세웠다. 이를 6총(六塚)이라고도 한다.

 

일제강점기 말기에 토지개간으로 무덤이 파괴되자 복천동 뒷산 영보단(永報壇) 부근으로 이장되었고,
1974년 금강공원 내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여 봉분 하나를 축조하였다. 동래구에서는 매년 음력 4월 15일에
별전을 모셔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참배를 마치고 금강공원 밖으로 나온다.


 

금강공원 입구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망미루로 내려가던 중
우측으로 난 길로 들어가서 고려오층석탑을 보러간다.탑은 민가 내에 있으며
관람을 원하면 초인종을 눌러라고 되어있지만 그냥 까치발로 관람을 하였다.

 

이탑은 부산시 지정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언제 어느 절터에서 옮겨왔는지를
알수없으나일제시기에는대청동의 일본인 후꾸다의 별장에 있던 것을
1957년 현위치로 옮겨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망미루를 보고 탐방을 마친다.

 


망미루는 1742년(영조 18)에 동래부사(東萊府使) 김석일(金錫一)이 동래부사청 동헌(東萊府使廳東軒)
앞에 세웠으며 조선 후기 전형적인 관아의 문루이다. 일제강점기 시가지 정리에 따라 금강공원 입구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호방한 글씨가 마음에 든다.


 

금강공원과 주변의 사적은 일본강점기 일본의 강한 입김이 작용하여 제자리 놓인
유물,유적이 드물 정도이다.

 

換至本處 本地風光환지본처 본지풍광

 


"본디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때 빛을 발한다."는 것을 일본인들이
깨달었으면 한다.


 

세월이 너무 흘러 버린 것은 아닐까?
아쉬움을 달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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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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