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경기,강원)도로를 따라 마음 내키는대로 가는 문화유산 답사

 

 

-.일시 : 2008.8.15~8.17
-.날 씨: 흐린 후 비 내리고 다시 개인 후 흐림
-.몇명: 4명
-.어떻게: 자가승용차 이용
-.일정:
수원 화성행궁-화성-(서울 본호텔 1박)-경복궁-국립민속박물관-종묘-간송미술관(휴관)-
중남미미술관-회암사지-(한탄강오토캠핑장 1박)-재인폭포-
노동당사-도피안사-고석정-
명성산 산정호수

-.테마: 문화유산답사,하계휴가

 

 

보통 다른 사람들은 휴가를 가면 한곳에 머무르면서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데 나는 과거나 지금이나 모두 승용차에 텐트를 비롯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길을 따라 문화유산답사를 하는 만행길을 좋아한다.독서로 치면 정독이 아닌 다독을 즐기는 셈이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 짧은 시간 여러곳을 볼 수 있고 시간도 빨리 흐른다.차를 운전하면서 가는길은 정해진 목적지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차창 밖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이 관찰의 대상이 된다.특히 대강의 일정만 적어 놓고 일단 출발을 하면 되는데, 차창 밖으로 일정에는 없었지만 눈길이 가는 장소가 있다면 그냥 그대로 일정에 편입시키면 되는 것이 좋다.그래서 나의 휴가기간 문화유산 답사는 미리 숙박지를 예약해 놓고 떠나 본적이 없다.

 

차내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므로 음악CD는 다양하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발라드나 트롯은 기본이고 타령,클래식도 좋고 강연을 녹음한 오디오북도 좋다.등산장비와 야영장비를 준비하고 카메라까지 챙기면 차의 시동을 걸면 된다.

 

이런 스타일은 나와 딸은 좋아하는데,와이프와 아들은 다소간 불만이 있다.그래서 그런지 나와 딸은 어느정도 경사진 곳도 잘 오르내리는데 와이프와 아들은 거의 슬로우 비디오 수준의 움직임을 보인다.

 

부산에서 서울과 경기 일원 그리고 강원도 철원까지 갔다오니 도로비와 유료비를 합친 금액에 각종 입장료,그리고 음식료 비용을 합치니 단촐하게 홀로 저렴한 해외여행을 가는 경비가 나왔지만 정체하며 한곳에 머무르는 것보다 유목민처럼 여러곳을 옮겨 다니는 이러한 여행이 체질에 맞으니 어쩌겠는가?

8.15 09:30
오늘은 광복절이다.광복 63년이되는 해이니 한국의 근현대사를 느끼기 위해서도 오늘 가는
답사일정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어떻게 바쁘게 살다보니 아직 경복궁,종묘도 한번 가보지
못했다.20대 시절
서울에서 4년 생활한 적도 있지만 그때는 주로 산행 위주로 다니다보니 도심
쪽으로는 가 보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TV에 가끔 비치다 보니 순전히 가 본거나 진배 없다는 의식 때문이었으리라.

부산,경남은 호우주의보가 내렸는데 출발시간 부터는 점치 날씨가 개이고 있다.구름은 있지만

맑아지던 날씨는 막상 수원 시내로 들어오니 한줄기 소낙비가 내린다.

오늘 첫 답사지는 화성행궁이다.먼저 주차장 앞에 있는 박물관에서 화성에 대한 공부를 먼저한다.


정조,장용영,무예24기,혜경궁 홍씨의 회갑연과 봉수당奉壽堂,정조가 현륭원에 전배(展拜)하기
위하여
행행(幸行) 때에 머물던 임시 처소였으나 오히려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1801)
행궁 곁에 화령전
華寧殿을 건립하여 자신의 사당이 된 곳이다.박물관 입구 서장대성조도
西將臺城操圖 그림이 담고 있는
장엄함이 전해져 온다.정조가 화성의 서장대에 갑옷을 입고
행차하여 군사 조련을 실시하는 장면이다.

이외에도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는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거행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
장면이고,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는 낙남헌에서 수행한 대신과 수원의
노인에게 양로연을
베푸는 장면이다.

화성성묘전배도(華城聖廟展拜圖)는 화성에서 거행했던 성묘(聖廟) 참배 장면이며
낙남헌방방도
(洛南軒放榜圖)는 문무(文武) 과거시험을 본 뒤 낙남헌에서 그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장면이다.

노량주교도섭도(鷺梁舟橋渡涉도) 노량진의 주교(舟橋)를 건너며 서울로 환궁하는 행렬
장면이고,
시흥환어행렬도(始興還御行列圖)는 화성 행궁을 출발하여 서울로 올라오면서
시흥 행궁(始興行宮)
앞에 도달한 행렬 장면이다.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는 화성 행궁 안의 득중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쏘기를 한 후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불꽃놀이를 구경하는 장면으로 다양한 그림이 사실적인 필체로 그려져
있다.

 

박물관을 둘러 본후 화성행궁으로 향한다.입구에는 느티나무 세그루가 삼정승나무라는
컨셉으로
연륜을 더해주고,화령전엔 정조의 초상화가 있다.행궁 후원에 있는 미로한정
정자에서 내려다보니
행궁은 궁궐의 축소판이다.

 

 

 

 

 

 

 

화성의 일부만이라도 보려는 의도에서 팔달문을 거쳐 창룡문에 도착해보니 연무대 근처는
활쏘기에
여념이 없고 서북공심돈과 서노대,그리고 창룡문을 둘러본다.공심돈은 전시에
사용되는 장거리
관측소로써 위·아래에 구멍을 많이 뚫어서 바깥동정을 살필 수 있을 뿐아니라
총포를 쓸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성벽상부에 3층구조를 이루고 있는데 아래층에는 군사들이 몸을 가리게 되어있다.

또한 이곳의 화장실은 외국인들이 화장실 투어를 할 정도 기품이 있고 깨끗하다.공중 화장실
내에는
에어콘이 가동되어 시원하고 화장실 내의 인테리어도 이곳 화성의 모습과 잘 어울린다.

특히 활쏘기는 이곳 정취와 참으로 잘 어울린다.짧은 시간에 이렇게 즐겁게 체험 할 수 있는 것
이 또
있을까? 그냥 화살을 주고 각자 알아서 쏘는 것이 아니다.짧은 시간이지만 아주 기초적인
부분부터
제대로 알려준다.

 

 

 

 

답사를 마치고 나니 다시 비가 많이 와서 3성급(모텔급) 본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닭볶음탕으로
저녁
만찬을 즐긴 후 서울에서 1박을 한다.

8.16

경복궁 관람시간에 맞추어 9시경 경복궁 주차장에 도착했다.전날밤 많은 비가 내린 후 다소간
날씨가
풀리는 느낌이다.

규모면에서 중국의 자금성과는 차이가 많이 나지만 짜임새와 격조는 오히려 우리의 고궁이
더 아름답다.근정전 근처는 수목이 별로 없지만 교태전 이후부터는 정원이나 수목이 많은 점은
풍수지리와 안전을
모두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근정문 앞 수로에는 해치의 신수(神獸) 조각물이 있는데 곧 물로 내려 설 듯한 자세가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해학적이다.

경복궁(景福宮) 조선의 궁원 중 정궁이다.경복궁은 청와대 뒤 진산인 북악을 등지고
백호白虎인
인왕산仁旺山과 청룡靑龍인 낙산駱山을 좌우에 두고 안산인 남산을 바라보면서
한양의 명당수明堂水
인 청계천淸溪川이 북부서(亥)에서 시작하여 묘(卯)으로 흘러가고,
한양의 객수(客水)인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가는 극길(極吉)한 명당에 터잡고 있다.


경복궁의 창건은 1395년이며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리고 1867년에 중건되었다.
경복궁의
면적은 327,508평방 미터로 장방형의 궁담이 설치되어 있다. 궁문은 남에
광화문(光化門), 동에
건춘문(建春門), 서에 영추문(迎秋門), 북에 신무문(神武門)이 있다.

 

궁전의 중심 건물은 남북의 중심축선에 배치되었던 것이다. 남에서 북으로 일직선상에 배치
되었던
건물은 광화문(光化門), 홍례문(弘禮門), 근정문(勤政門), 근정전(勤政殿),
사정전(思政殿),
강령전(康寧殿)(왕의 침전), 교태전(交泰殿)(왕비의 침전)이다.이는 3문을
거쳐서 정전에 이르게 한
궁제이다.

 

 

 

 

근정문(勤政門) 앞에 경회루(慶會樓) 남쪽과 건춘문 안의 남쪽 공간이 된다. 이 외조 공간에는
승정원,
홍문관,예문관, 상서원, 사옹원, 빈청, 오위도총부, 검서청, 내의원, 수직사 등이 있었다.



또한 느티나무, 회화나무 등을 심어 원림을 조성하였고, 광화문 안의 좌우공간에 방지(方池)
2개가
있었다.

그리고 북악에서 흘러내리는 명당수가 외당(外堂) 앞으로 흐르면 길하다는 풍수설에 의해
개울이
근정문 앞을 흘러 동으로 나가고 있었다.


이 개울 위에 영제교(永濟橋)(현재 근정전 동쪽에 옮겨 있음)가 설치되어 조선 석조조각의
대표적인
예술품인 해치의 신수(神獸) 조각물과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했다. 그러나
일제는 1920년대에
광화문을 헐어옮기고 영제교도 이전시켰다. 또한 이 외조의 공간에
조선총독부 건물
(현 국립중앙박물관)을 건립하여 조선 정궁의 궁원과 위엄을 파괴하였다.

 

왕궁 앞 정문 안에 느티나무나 회화나무를 심어 원림을 조성하는 것은 중국 주나라 때부터 괴목
밑에
삼공이 앉아 정사를 보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 왕궁의 별칭이
괴신(槐辰)이라 하고,
정승이나 판서의 직위를 느티나무, 회화나무의 위치라 하여
“괴위(槐位)”라고도 한다.

 

이로 인해 궁궐의 문 앞에는 꼭 느티나무나 회화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하였다.

 

 

조회나 의식을 행하는 근정전(勤政殿)과 정무를 보는 사정전(思政殿), 천추전(千秋殿),
만춘전(萬春殿)
이 있다.

이 치조의 공간은 수목을 심어 조경하지 않는다. 그러나 근정전의 이단축대는 12지신상과
4신을
완숙한 조각술로 조각하여 방위신이 지켜주는 신성한 건물임을 상징하고 있다 회랑 안
정전 마당은
억센 돌떼기 기법을 사용한 판석을 깔아 햇빛으로 인한 빛의 반사를 막고 거닐때
미끄러지지 않게
하며, 절묘한 구배를 주어 배수를 과학적으로 처리한 것은 무심히 보아 넘긴
건축술이 아니다.

 

 

 

향오문(嚮五門) 북쪽 안에 왕의 침전인 강령전과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 이에 부속된
침전들과
대비(大妃)의 침전인 자경전(慈慶殿)등이 있다.

 

경회루(慶會樓)는 사신을 영접하고 궁 안에서 연회를 베푸는 장소이지만 침전 서쪽에 붙어있는
원지이다.

침전 공간의 조원은 경회루 방지와 왕비의 침전 후원이던 아미산(峨眉山)과 자경전(慈慶殿)
안에
화담과 십장생 굴뚝이 남아 있다.


교태전(交泰殿)은 경복궁의 가장 중심에 배치되어 있다. 교태전 후원은 선산(仙山)을
상징하여
아미산이라 한 것인데, 장방형의 단 모양을 한 동산이다.

옛날에는 제일깊은 중궁전(中宮殿)의 후원이다. 화계(花階)가 조성되었고, 화계의 단에는
화목과
수조(水槽), 괴석대가 배치되고 육각형 아름다운 화전(花塼)의 굴뚝 4개가 서 있다.

굴뚝높이는 260센티미터이며 한 면 폭이 88센티미터이다. 굴뚝 벽면에는 모란, 국화, 소나무,
대나무,
매화, 당초문, 용, 호랑이, 학, 해태, 구름 등이 조형전으로 조성되어 있다. 아미산에
남아 있는 늙은
배나무가 인상적이다.

자경전(慈慶殿)은 대비의 침전이므로 언제든지 중궁전의 동쪽에 두는 법이다. 대조전마당
안에는
화목을 심지 않는다. 그러나 대비가 오래 살도록 축수하는 뜻으로 화담에는 거북문,
천도(天桃),
모란, 매화, 국화, 연꽃 등이 배치되고 “만수”라는 글자 무늬도 새겨 있다.

 


후원 뒤뜰 담벽에 붙은 굴뚝에는 해, 달, 바다, 거북, 불로초, 학, 구름, 거북, 사슴, 소나무
등이
화전으로 장식되었다.

 

 

방지(方池)는 남북 113미터, 동서 128미터의 못에 3개의 장방형섬을 조성하고, 동쪽 큰 섬에
웅장한
경회루를 건립하고 3개의 돌다리를 설치하였다.

석교의 석난간과 하엽동자(荷葉童子)와 법수(法首)의 해태 조각들이 조선 석조 조각의
수준높은
솜씨를 보여준다.

현 경회루는 1867년에 건립된 것이다. 연산군 때인 1506년에 “경회루 방지에서 금, 은,
비단으로
장식한 황룡주(黃龍舟)를 왕과 왕비등이 타고 산호, 비단으로 장식한 등(燈)을
물 위에 띄우고
호화로운 잔치를 벌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후원으로 가니 여기에는 향원지(香遠池)와 녹산(鹿山) 등 원림(苑林) 공간이 있다.
원래 왕이나
왕족들이 휴식하고 소요하던 곳이다.

향원정 북쪽에 1873년 건청궁(建淸宮)을 지었다. 향원지는 4,605평방 미터의 넓이에 방형인데
가운데
324평방 미터의 원형섬이 있고 섬 가운데 육각형의 정자인 향원정이 서 있다.
이 향원정에 들어가는
목교가 원래 북쪽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1953년에 남쪽으로 옮겨 놓았다.

향원지(香遠池)란 주렴계(周廉溪)의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말이다. 그래서 못 속에 연꽃을
심고
못 주위에는 배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산사나무, 버드나무, 참나무, 단풍나무
등이 수림을
이루었다.

 

이 연못의 수원은 열상진원(冽上眞源)이라는 샘물인데 수입시설(水入施設)이 물을 꺾어서
물 밑으로
잠겨들게 만든 것이 특이하다. 녹산(鹿山)은 창덕궁 비원과 같은 원림(苑林)을
형성하고 있다.

향원정 뒤로 건청궁이 새로 복원되었다.이곳은 원래 고종 10년(1873)에 지어진 건청궁이 있었다.
당시 건청궁은 고종의 주도하에 이곳에 건립되었는데, 이는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으로
부터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고종의 친정(親政)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실제 건청궁을 짓고 고종이 직접 정무업무를 주도하면서 흥선대원군은 정치적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뒤 건청궁은 1929년 10월 시정 20주년기념 조선박람회를 개최한다는 핑계로 일제에 의해
모두
헐리고 만다. 또한 1939년에는 이곳에 미술관을 짓고, 해방이후에는 민속박물관 등으로
쓰이다가
최근에 헐리고 빈터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곳은 1895년 10월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발생한 명성황후 살해사건인 을미사변의
현장이기도 하다.

 

 

 

 

경복궁 내 한켠에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조선왕실의 문화와 전통민속문화를 함꼐 할수있는 곳
이다.
박물관은 한국의 전통적인 생활문화상이 전시되어 있으며 ,민속문화의 조사 연구.
유물수집,보존등
전통문화 계승에 힘쓰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까지 관람 후 점심식사를 매식하고 종묘로 향했다.

입구부터 세갈래길이 뚜렷하다.가운데 길은 신(神)을 위한 길이라 하여 신향로(神香路)로라
하며,
동쪽의 길은 왕을 위한 어로(御路) , 서쪽의 길은 세자로(世子路)라고 한다.
신향로는 신주를 종묘에
모시거나 제사를 위해, 향(香), 축(祝), 폐(幣)를 들여 올 때에 이 길을
이용한다.


종묘의 정문인 외대문(外大門) 또는 창엽문(蒼葉門)에서부터 다른 궁궐의 정문과는 다르다.

화려한 장식은 피하고 단청은 최소한의 색을 사용하여 붉은 색을 주로 녹색칠을 하였다.
종묘에는
창문도 없고 문에도 나무판자를 붙여 빛이 스며들지못하게 하여 혼이 편안히 쉴수
있도록 배려한
건물 꾸밈새가 참 독특하다.종묘의 정문인 창엽문은 혼이 드나들 수 있게
중간문 위를 홍살로 만들어두었다.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은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봉행하는 종묘대제에서 보태평 11곡과
정대업
11곡이 연주된다고 하는데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다.

나는 녹음된 종묘제례악을 들어보았을 때 처음엔 좋은 줄을 몰랐는데, 반복해서 몇 번을
들어 본
이후에 대단한 음악이라는 표현을 수긍 할 수 있었다.

처음엔 평소에 별로 들어보지 못했던 음악의 장르라서 좋고 나쁘고의 분별이 안되는 짧은
음악지식
때문이었을 것이다.지금도 문외한이지만 그 장중한 음률이 주는 느낌은 공감하게 된다.

정전 앞 계단의 소맷돌의 구름 문양이 있는데 이는 천상으로 오름을 상징한다고 한다.

 

종묘를 둘러 본 후 간 곳은 간송미술관이었다.그렇지만 아쉽게도 휴관이어서 중남미미술관이
있는
중남미문화원으로 향했다.

입구의 돈끼호테 조각을 시작으로 미술관과 야외조각이 있다.이번 일정에 굳이 이곳을 선택한
것은
우리가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를 실제 여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중남미를
여행하지 않고
그곳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타코라는 식당에서 멕시코 음식도 즐 길 수 있다.

중남미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던 이복형 대사가 처음에는 취미 삼아 벼룩시장 같은 곳에서
하나 둘
수집하다가 중남미의 독특한 문화에 매력에 빠져 사재를 털어 많은 작품들을 수집하여
이렇게 독특한
박물관을 세웠다고 한다.

이복형 원장은 멕시코 대사를 비롯 주로 중미,가리브해와 중남미 등에서만 30 여년간 외교관
생활만
하셨다고 하는데 내가 이 박물관을 알게 된 것은 1997년 이 박물관을 개관하면서 TV에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이제야 뒤늦게 관람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개인 박물관이라 하지만 운영자가 이 박물관을 중남미 문화원 재단에 기증했기 때문에
공립
박물관이나 다름없다곤 하지만 다른 곳 보다는 입장료가 비싼 편이고 사진촬영을 못하게
하여 다소
아쉬웠다.이곳에서 플롯 소리가 애잔하면서도 경쾌한 중남미 음악 CD 하나를 구입
하고 바로
회암사지로 향했다.

 

회암사지는 아직도 발굴중인 조선최대의 절터이다.회암사지는 1964년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1328년(충숙왕 15)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인도의 승려 지공(指空)이
인도의 아라난타사
(阿羅難陀寺)를 본떠 창건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이었다. 1376년(우왕 2)
나옹(懶翁)이 중건하고,
조선왕조에 들어와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명으로
정현조(鄭顯祖)가 재중창하였는데,
명조 때 보우(普雨)가 실각한 후 쇠퇴하기 시작하여
19세기 초에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절터는 천보산 남쪽 기슭 경사진 대지에 있으며, 계단상으로 8단의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여러 건물을
세웠던 흔적만 남아 있다.

절터 뒷편 북쪽 구릉의 능선에는 지공·나옹·무학(無學)의 3화상(和尙)의 사리탑이 있고,
절터에는
무학의 부도(보물 388) 및 비(碑), 선각왕사비(禪覺王師碑:보물 387), 나옹과 지공의
부도 및 석등,
쌍사자석등(보물 389) 등이 있으며,오른쪽 골짜기에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
(奉先寺)의 말사인 현 회암사가 있다.

 

나는 자주 폐사지를 찾는 편인데 처음엔 가족들이 도대체 이런 망가진 곳을 왜 보느냐는
눈치였지만
지금은 폐사지 그 자체를 보는 것 같다.근묵자흑이라 무엇이든 계속되면 자신도
모르게 젖어드는 것이다.

 

 

 

 

 

 

 

 

 

 

답사 이틀째의 여정을 마치고 한탄강오토캠핑장에 여정을 풀고 야영을 하며 밤을 보낸다.
돼지바베큐로
저녁을 든든히 한 후 승용차 DMB로 장미란 역도선수의 금메달을 확인 한 후,
둥근 달 빛이 비치는
강변에서 폭죽놀이를 즐기며 시원한 여름밤을 보냈다.

 

 

 

8.17


답사 사흘째인 마지막날이다.오늘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재인폭포才人瀑布이다. 한탄강漢灘江가
에 있다.
길이 100m, 너비 30m, 높이 18m 이다.

다른 폭포와는 달리 평지가 움푹 내려앉아 큰 협곡이 생기면서 폭포가 생겼다. 폭포에 관한
전설이
전한다. 옛날 줄타기를 잘하던 재인이라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는데,
이 고을 수령이 부인을
탐하여 재인을 죽이자 재인의 부인은 수령의 코를 물고 폭포에서 자결
하였다. 그 뒤 재인폭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폭포 위에는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용소(龍沼)가 있다고 하는데 보진 못했다.

 

 

 

고석정 가는길에 철원 노동당사가 있다.1946년 초 북한 땅이었을 때 철원군 조선노동당에서
시공하여
그해 말에 완공한 러시아식 건물이다.

1,850㎡의 면적에 지상 3층의 무철근 콘크리트 건물로, 현재 1층은 각방 구조가 남아 있으나,
2층은
3층이 내려앉는 바람에 허물어져 골조만 남아 있다.

1층 구조를 보면 몇 개의 방은 공간이 매우 협소해 1~2명이 사용하였거나 취조실로 사용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6·25전쟁의 참화로 검게 그을린 3층 건물의 앞뒤엔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다.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1개 리(里)당 쌀 200가마씩 거두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제
모금과
노동력 동원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내부 작업은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8·15광복 후부터 6·25전쟁이 일어나기까지 공산치하에서 반공활동을 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잡혀
와서 고문과 무자비한 학살을 당하였다.

당사 뒤편에 설치된 방공호에서 사람의 유골과 실탄, 철사줄 등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그때의
참상을
알 수 있는 곳이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하였으며, KBS 열린음악회가 녹화
되기도
하여 눈에 익은 곳이다.

 

 

철원지방은 열하분출로 형성된 용암대지로 지형이 특이 하다.넓다란 평야가 있어서 후삼국
시대에는
궁예가 수도를 삼았던 곳으로 옛 태봉국 도읍지가 남아있다.지금은 군부대 주둔지로
여기가
최전방임을 알 수 있고, 용암이 서해로 빠져나가는 자리는 한탄강이 되었다.

고석정 도착하기전 도피안사가 있다.부처가 스스로 피안의 곳에 이르렀다해서 이름을
도피안사
到彼岸寺라 했다고 한다.

한자의 뜻으로 피안에 도착한다(=이른다)는 뜻이다. 도피안사라는 이름을 보는 순간 뭔가
마음에
끌리는게 있었다.

도피안사에서 볼만 한 것은 철조비로자나불과 3층석탑이다.모두 통일신라 시대인 9세기에
조성된 것이다.


스님은 철조비로자나불 앞에서 염불을 하고 계셔서 대웅전 옆문으로 잠시 조용히 예경하고
나왔다.

 

 

허리 굽고 귀도 절벽인 노승이 누덕옷 속에
길을 모두 감추고 떠나버려서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 일찍 뜬 달이
둑 위의 가랑닢과 누워 섹스하는 모습만 훔쳐보고
돌아왔다

 

이 성선 시인의 도피안사라는 시詩다.

 

"그 곳으로 가는 길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의 그 곳은 피안의 세계를 암시한다.

피안의 세계로 가는 길을 모두 감추고 이정표를 알려줄 이도 떠나 버렸기 때문에 더욱 신비로운
것이다.

200년된 보호수와 천년세월의 3층석탑,그리고 몇 번의 복원과 6.25 당시 땅에 뭍혀진 세월에
아랑곳
없이 장독대 뒤 허드러지게 만발한 꽃들이 더욱 아련하게 만들었다.피안의 세계 또한
노력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달과 가랑닢이 섹스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지만 태양과 꽃들이 섹스하는 장면만
훔쳐보고
돌아온 것이다.

 

 

 

한탄강 중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고석정이다.이곳은 래프팅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임꺽정의 전설이 있는 이곳에서 우리가족은 래프팅 보다는 모터 보트를 타고 고석정 주변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래프팅 하는 분들이 바위 끝에서 한탄강으로 다이빙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돌아오는 길에 산정호수를 잠시 둘러 본 후 의정부IC를 거쳐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충주,
김천을 지나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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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
,방랑의 은빛 달처럼

風/流/山/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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