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신화를 역사로 만든 나정과 폐사지를 찾아서 

 

- 일시: 2024-3.2~3
- 날씨: 흐린 후 맑음
- 몇명: 홀로

 

3월1일부터 3일까지 사흘간 연휴를 맞아 다소 멀리 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중학교 동기모임이 중간 날짜인 3월2일 알박기처럼 예정되어 있어 내심 고민을 했지만 풍류라는 것이 교만인우(交萬人友)라고 하여 사람 만나는 것을 소홀히 하지 않는 부분 때문에 오랫만에 만나 회포를 풉니다.동기를 만나면 동기 중에 술자리에서는 주인이 되는 친구가 한명은 있게 되는데 여지없이 주처작주(酒處作主) 주인장 노릇을 하는 동기 덕분에 왁자지끌한 분위기로 파했습니다.

 

이렇게 다소 멀리 가고자 하는 목표지가 어렵게 되면 부산에서 언제나 쉽게 출발해서 가더라도 볼거리가 무궁무진한 경주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이번에 간 곳은 박혁거세 신화가 역사의 현장으로 탈바꿈한 나정입니다.박혁거세 신화는 건국신화 내지 건국시조신화와 마찬가지로 천신이 강림하여 나라의 첫 기틀을 잡았다는 기본적인 줄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혁거세라는 이름 자체가 ‘불거내(弗矩內)’ 곧 ‘세상 밝힘’을 의미하였다는 데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역시 하늘에서 내려온 고조선의 시조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의 것으로 보입니다.

역사가 되려면 짧은 생각으로 미루어 보다라도 일단 고고학으로 기록이 있으면 제일 좋고  유적지가 있다면 더욱 신빙성을 높여주겠죠.그기에 요즘은 언어학과 유전학까지 포함하면 더욱 확실해진다고 봅니다.

 

 

 

 

 

▷ 답사일정(風輪) :222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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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3-2

동기들과 저녁 6시에 만나 8시반쯤 파하여 바로 경주로 향해 육부전 앞에 주차를 합니다.

▷육부전

 

(일박)


2024-3.3

 

육부전(六部殿)은 진한(辰韓) 육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입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신라가 건국하기 전에 진한 땅에는 고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누어 살면서 육촌을 이루었다고 합니다.알천양산촌,동산고허촌,취산진지촌,무산대수촌,금산가리촌,명활산고야촌인데 기원전 57년에 여섯 촌장이 알천 언덕에 모여서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신라의 초대 임금으로 추대하였고 이 해가 바로 건국년이 됩니다.신라 제3대 유리왕때 여섯촌장들에게 성을 하사하니 양산촌은 양부 이씨,고허촌은 사량부 최씨,대수촌은 점량부  손씨,진지촌은 본피부 정씨,가리촌은 한기부 배씨,고야촌은 습비부 설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나정( 蘿井)

 

나정은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 탄생과 과련한 설화가 전하는 곳입니다.



신화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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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 땅의 여섯 마을 우두머리들이 알천 상류에 모였다. 군왕을 정하여 받들고자 하여 높은 곳에 올라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양산 기슭에 있는 나정이라는 우물가에 번개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드리워진 흰말이 엎드려 절하고 있었다. 찾아가서 그곳을 살폈더니 자줏빛 알이 있었고 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오매, 경이롭게 여기면서 동천 샘에 목욕시키니 온몸에서 빛살을 뿜는 것이었다. 이때 새와 짐승이 더불어 춤추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고 해와 달이 청명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혁거세왕이라 이름을 짓고 위호(位號 : 벼슬의 등급 및 그 이름)는 거슬한(居瑟邯)이라고 하였다.

그즈음에 사람들은 다투어 치하드리며 배필을 구하라고 하였다. 같은 날에 사량리 알영 우물가에 계룡이 나타나 그 왼쪽 겨드랑이로 딸아이를 낳으니 그 용모가 수려하였으나 입술이 꼭 닭의 부리와 같았다.

이내 월성의 북천에서 미역을 감기자 입부리가 떨어졌다. 궁실을 남산 서쪽 기슭에 세우고 두 신성스러운 아이를 봉양하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태어났으되, 알이 박과 같으므로 그 성을 박씨로 삼았다.

딸아이는 그녀가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으로 삼았다. 그들 나이 열셋이 되매 각기 왕과 왕후로 삼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서벌·사라 혹은 사로라고 일컬었다.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더러 계림국이라고도 하였으나 뒤에 신라로 고쳐서 전하였다.

나정은 조선시대부터 진위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초기기록을 의도적으로 불신한 일본 학자들 역시 나정을 역사가 아닌 허구로 여겼습니다.일본학자들의 논리가 그대로 한국 사학계를 뒤덮어 단군신화,김해 가락국신화 등 초기기록을 불신하여 반만년 역사가 아닌 2천년 역사에 머물러 있습니다.중국은 요하문명 발견 이후로 동북공정을 통하여 말도 안되는 산해경 내용도 역사로 끌어 올리는 마당에 한국은 기록으로 존재하는 것 조차 부정하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박혁거세 신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씨족사회가 연합되어 하나의 왕국으로 뭉쳐져 가는 과정이 보이고 천신이 강림하되 김해 구지봉 신화처럼 멧부리가 아닌 우물에 강림한 것은 특이점인데 우물을 상당히 신성시 한 것으로 보입니다.

 

흰말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현실적으로 보면 북쪽에서 내려온 강력한 유목민세력으로 유추됩니다.

 

나정의 나(蘿)는 "소나무겨우살이 나"라는 한자입니다. 이곳의 소나무는 한그루한그루 모두 명품 소나무입니다.이 곳을 상당히 신성시한 느낌이 듭니다. 이 분위기 참 좋다는 느낌이 듭니다.

 

신라 개국의 시조 혁거세 新羅始祖赫居世
알을 깨고 나온 자태 빼어나 剖卵生成岐嶷姿
동국의 천 년 왕업 창건하였으니東國千年王業創
지금도 사람들 탄생이 기이하다하네 至今人道誕生奇

- 성여신 1546~1632) 부사집 권1 나정

(필사)

상징적인 우물터 옆에 진짜 우물이 있는 것은 발굴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https://youtu.be/BpZrhf6H220?si=hLBU0ZrMNaAtkVTz

 

▷남간사지 석정

남간사 터에 있는 돌우물로 깊이가 1.4m 정도 된다고 합니다.자연석으로 외벽을 짜 올리고 위쪽은 2장의 다담은 돌로 원형틀을 덮어 마감하였습니다.이곳 우물과 분황사 석정,재매정 우물을 보면 신라시대 우물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우물 주변에도 주춧돌같은 부재가 보입니다.그 중에 팔각의 부재가 보이는데 나정의 팔각건물지의 기단으로 유추해보면 상당히 우물에 대해서 신성시 한 느낌이 듭니다.

▷창림사지

봄이 되어 산비탈을 오르는데 땅들이 질퍽합니다.탑가까이 이르니 땀이 제법 쏟아집니다.팔부신중상이 보이고 남산에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큰 탑으로 8세기 경 작품이라고 합니다.무엇보다 창림사는 박혁거세의 궁실이 있었던 곳입니다.

 

 

신화에 나오는 창림사 관련 내용입니다.

"궁실(宮室)을 남산 서쪽[지금의 창림사]에 짓고는 두 명의 신성한 아이[혁거세와 알영]를 모셔다 길렀다. 사내아이[혁거세]는 알에서 나왔는데, 알은 박과 같이 생겼다. 사람들은 박을 박(朴)이라 하므로 성을 박(朴)으로 삼았다.[박씨 성을 갖게 된 이유] 계집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알영]으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의 나이가 열세 살이 된 오봉(五鳳)[한나라 선제의 연호] 원년 갑자(甲子)에 남자는 왕이 되고 여자를 왕후로 삼았다."


아래로 내려오니 비석 아래에 보이는 쌍 거북이 모습의 귀부가 부서진 채 보입니다.

▷남간사지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논 한가운데 보입니다.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으로 소박하고 간단한 모습입니다.특히 꼭대기의 열십자(十)모습은 다른 곳에선 못 본 형태라서 눈길이 갑니다.

 

▷천관사지

이인로의 파한집 내용입니다.삼국사기나 심국유사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신라 때의 명장이자 화랑 김유신(金庾信)은 젊었을 때 어느 기생을 가까이 해 그 집에 자주 드나들곤 했는데, 어머니 만명 부인이 이를 꾸짖자 김유신은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다. 하루는 술에 취해 말을 타고 오다 잠이 들었는데, 말은 주인이 가던 옛 길을 기억하고서 그만 기생의 집까지 이르렀다. 기생은 울며 김유신을 맞으러 나왔지만, 술에서 깬 김유신은 기생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기생의 집 앞으로 태우고 온 말을 베어 죽여 버리고는 말안장까지 버린 채 가버렸다. 이후 기생이 살던 집에 천관사가 지어지게 되었고, 천관은 기생의 이름이었다는 것이다."

천관사지 안내판에는 "김유신은 말의 목을 베고 냉정하게 천관을 뿌리쳤다.이를 슬퍼한 천관이 목숨을 끊었고,후에 김유신은 천관이 살던 집에 천관사를 지어 그녀의 명복을 빌어 주었다고 한다."

김유신의 냉정한 결단은 아들 김원술이 당나라와의 석문전투에서 퇴각한 것을 두고 김유신은 왕실과 가문의 뜻을 저버린 죄를 물어 김원술을 처형하라고 주청했고, 문무왕은 죄를 용서했습니다만 김유신은 부자로서의 연을 끊겠다고 선언합니다. 이후 김원술의 어머니인 지소부인도 아들로 인정하지 않아 김원술은 평생 산속에서 벼슬없이 살았습니다.저는 역사적으로 볼때 가장 무서운 분이 김유신으로 보입니다.



《파한집》에는 기생 천관이 자신을 버리고 무정하게 떠난 김유신을 원망하며 지은 원사(怨詞)가 있었다고 했지만 전해지지 않고, 다만 이공승의 시를 수록하였습니다.

 

천관사(天官寺)

 

寺號天官昔有緣  천관이라는 절 이름에 사연이 있는데
忽聞經始一悽然  새로 짓는다는 말 듣고 마음이 처연하네
倚酣公子遊花下  술 기운 가득한 공자는 꽃 아래서 노닐었고
含怨佳人泣馬前     한을 품은 아름다운 여인은 말 앞에서 울었다네
紅鬣有情還識路  말조차 정겨워서 그 길을 떠올렸을 뿐인데
蒼頭何罪謾加鞭     종놈은 무슨 죄라고 채찍만 때려댔는고
唯餘一曲歌詞妙  남은 것은 오직 한 곡조의 어여쁜 노래뿐
蟾兔同眠萬古傅  달 속에서 함께 자리라는 가사를 만고에 전하네

(필사)

 

사각형의 바닥돌 위에 팔각형의 몸돌을 얹은 삼층석탑이며 지붕돌 밑면은 보통 각지게 3단 혹은 5단으로 들어가며 마무리되는데 이곳은 연꽃 모양으로 된 점이 독특합니다.

▷황복사지

황복사는 낭산 동북쪽에 있었던 신라시대의 절로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출가했다고 합니다.

1942년 국보인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을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종묘성령선원가람(宗廟聖靈禪院伽藍)이라는 사리함에 새겨진 명문이 발견되면서 종묘적 기능을 한 왕실 사원으로 추정되어 온 황복사지는 신라불교의 열쇠라 불리며 그간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품고 있으며 동시에 숱한 의문을 안고 있는 곳입니다.

5차 발굴을 했음에도 신라의 호국사찰인 사천왕사보다 앞선 시기의 유물 유적이 나와 이치에 맞지 않고 탑이 금당보다 높이 있는 점이 일반적이지 않고 왕릉에 사용하려고 한 십이지신상의 기단이나 부재가 많아서 이상합니다.문헌사료가 부족하고 왕실사원인데 왕릉이 없고 가릉이 있는 점 등 명확하게 풀리지 않은 의문점이 여전히 있습니다.

 
지붕돌 밑면은 각지게 5개의 층이 보입니다.

▷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

미탄사로 가려고 했는데 네비게이션이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여 오히려 세렌디피티가 된 곳입니다.낭산 마애보살삼존좌상은 보살과 신장으로 구성된 삼존상으로 중앙의 본존은 머리에 두건을 쓴 지장보살입니다.본존 양쪽의 협시는 많이 훼손되어 대체적인 윤곽만 추정해봅니다. 

▷능지탑지(陵只塔址)

네면에 십이지신상을 세워넣고 연꽃 문양의 무뉘를 새긴 돌을 쌓아 탑신을 만든 5층탑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보이는 것은 기단과 1층 뿐입니다.능지탑 뒤에 부재들이 더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661~681 재위)이 자신이 죽으면 10일 내에 왕궁 바깥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을 했는데 실재로 가까운 사천왕사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어 경주 능집탑지에서 문무왕을 화장한 것으로 추정하여 능지탑 혹은 능시탑이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폐사지를 탐방하려면 늦가을에서 겨울에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봄이 되니 꽃이 피어 좋지만 역시 땅이 질퍽거려 신발과 차량의 타이어 근처는 모두 뻘입니다. 여름엔 역시 모기때문에 좋지 않습니다.

▷미탄사지

미탄사지 삼층석탑은 경주 분지의 평지에 남아있는 유일한 삼층석탑으로 10세기 경에 조성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주변은 한창 발굴 중으로 보입니다. 지붕돌 밑은 각지게 3개의 층이 보입니다.역시 우리나라 탑은 홀수입니다.


월성 오른쪽으로 멀리 홍륜사 첨성대 동궁과 월지 광장이 있고 우측엔 황룡사지 좌측엔 미탄사지가 있군요.이곳은 평지다보니 온통 뻘밭입니다.

▷천군동사지

서탑이 좀 더 보존상태가 좋습니다.이곳은 어떤 절이 있었는지 알수 없어 그냥 천군동사지 삼층석탑으로 불립니다.

▷숭복사지

 

신라말기의 고운 최치원이 사산비명으로 유일하게 신라의 수도에 세워졌던 신라 초월산 대숭복사비 복원을 해놓았습니다. 비석이 없어서 지리산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의 글자를 집자하여 비석을 중각 복원한 비석이 보입니다.

 


숭복사지 삼층석탑은 네면에 2구씩 팔부중상을 새겼고 몸돌에는 문 모양을 새겼습니다.

금당지는 주춧돌만 보입니다.

 


경주에는 280여개의 폐사지가 있다고 하니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습니다.이전에 가 본 폐사지로는 감은사지, 장항리 오층석탑,황룡사지,분황사지,원원사지,망덕사지,사천왕사지,남산동 동서 삼층석탑,염불사지,나원리 오층석탑,정혜사지 십삼층석탑 등을 가보았기 때문에 경주의 모든 폐사지를 가본 것은 아니지만 오늘까지 둘러 본 것을 합하면 이름있는 폐사지를 둘러 보게 되었습니다. 

<삼국유사>는 경주를 가리켜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절은 하늘의 별처럼 펼쳐져 있고 탑은 기러기 떼처럼 줄지었다)’이라고 묘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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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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