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새로운 사회와 문화의 꿈이 담긴 남도답사1번지 청자골

- 언제 : 2012.6.3(일) 06:00~21:30
- 얼마나: 2012.6.3 11:00~17:00
- 날 씨 : 맑음.더위
- 몇 명: 46명
- 어떻게 : 고적답사회 동행
▷청자박물관-사의재-남문식당(점심)-영랑생가-백련사-다산초당-무위사-월남사지

금요일 저녁과 토요일 사진출사를 위하여 강원도를 다녀 온 후 토요일 저녁 중학교 동기모임은 시간이 늦어 참석을 못하였다.볼 멘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한 느낌을 안고 일요일 새벽부터 강진 문화유산답사를 떠났다.

 

강진이라는 호칭은 백제시대의 "도강"과 동음현의 "탐진"이 영합된 지역으로 도강의 "강"과 탐진의 "진"이 합해진 지명으로 2012년 5월말 현재 인구 4만200여명의 군으로 "남도답사1번지 청자골 강진"이라는 슬로건이 귀에 익었다.

 

오늘 문화유산답사는 최영호 교수님이 지도하고, 전라도 사투리가 구수한 강진군의 여성 문화해설사님의 상세한 설명으로 상당히 만족한 답사를 하였다.

 

 

 

청자박물관/강진군 대구면 고려청자도요지 일원

 

예전 등산을 했던 주작산이 서쪽에 보일 즈음 강진에 온 것을 실감하였다.
보리타작을 마친 논은 들불을 피워 연기가 군데군데 자욱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고려청자를 생산한 전국의 400여기 가마터 중에서 200여기가 남아있는 강진은
온화한 기후와 양질의 점토가 풍부하다고 한다.역시 가장 먼저 들른 곳은
강진 청자박물관이다.

 

도자기를 빚는 도공의 형상을 한 동상 뒤로 철꾸러미 속에 청자가 가득하다.
그리고 주변은 온통 그 보기 힘들다는 녹나무가 울창하다.

 

목재의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여 임진왜란때 사용하였던 거북선의 주요부분은
녹나무 목재를 사용하여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청자박물관 내부에서 우선 고려청자에 관한 영상물을 시청한 후
문화유산해설사가 청자가 되는 과정을 설명해주셨다.

 

내부에 전시된 15억 가치의 꽃무늬 참외모양 주자를 비롯하여
도공들이 비색을 내기 위하여 피나는 노력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과정이 눈에 들어온다.

요즘 TV사극 무신의 소품 중 청자는 이곳에서 지원했다고 한다.


 

주변엔 소나무를 넣고 70일간 주야로 불을 밝혔을 가마터가 다수 보이고
도자기 체험장 옆의 꽃들도 예쁘다.

 

내부 천장의 격자시설물이 아름다운 청자 전시판매장엔 고가의 청자를
비롯하여 원삿잔을 비롯하여 남근모습의 소품도 보인다.


 

지붕을 청자기와로 이은 계룡정은 개경에 있던 양이정을 재현 한 것이라고 한다.

박물관을 나오니 맞은편엔 청자기와로 만든 개인주택이 보여 역시
여기가 강진임을 실감하였다.




 

청자박물관을 나와 다산 정약용이 유배를 와서 맨 처음 머물렀던 주막인 사의재를
들렀다.사의재는 2007년 복원했는데 정약용이 주막집(東門賣飯家) 주인 할머니의
배려로 골방 하나를 거처로 삼은 다산이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교육과 학문연구에
헌신키로 다짐하면서 붙인 이름이다.다산 실학의 성지는 보통 이곳 사의재를 포함하여
다산초당,보은산방,이학래의 집으로 친다.

 

사의재는 다산의 최초 제자인 황상 등 강진읍 여섯 제자에게 교육을 시킨 곳으로
모든 제도의 개혁원리를 제시한 "경세유표"를 비롯하여 "애절양"을 집필한 곳으로 유명하다.

 

애절양哀絶陽이란 "절양" 즉 남자의 생식기(성기)를 자른 것을 말한다.

다산이 직접 견문 한 것을 시로 쓴 것이라고 하니 악행의 정치는 호랑이 보다
무서운 것이다.

 

다산 정약용의 애절양(哀絶陽 양경을 자른 것을 슬퍼하며)

蘆田少婦哭聲長 [노전소부곡성장] 노전마을 젊은 아낙 그칠 줄 모르는 통곡소리
哭向懸門呼穹蒼 [곡향현문호궁창] 현문을 향해 슬피 울며 하늘에 호소하네
夫征不復尙可有 [부정부복상가유] 쌈터에 간 지아비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自古未聞男絶陽 [자고미문남절양] 남자가 그 걸 자른 건 들어본 일이 없다네
舅喪已縞兒未澡 [구상기호아미조] 시아비 상복 막 벗고, 아기는 탯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三代名簽在軍保 [삼대명첨재군보] 삼대가 다 군보에 실리다니
薄言往愬虎守閽 [박언왕소호수혼] 가서 아무리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里正咆哮牛去皁 [이정포효우거조] 이정은 으르렁대며 마구간 소 몰아가고
朝家共賀昇平樂 [조가공하승평락] 조정에선 모두 태평의 즐거움을 하례하는데
誰遣危言出布衣 [수견위언출포의] 누구를 보내 위태로운 말로 포의로 내쫓는가
磨刀入房血滿席 [마도입방혈만석]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自恨生兒遭窘厄 [자한생아조군액] 자식 낳아 군액 당한 것 한스러워 그랬다네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무슨 죄가 있어서 잠실음형 당했던가
閩囝去勢良亦慽 [민건거세량역척] 민땅 자식들 거세한 것 그도 역시 슬픈 일인데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자식 낳고 사는 이치 하늘이 준 바이고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건도녀] 하늘 닮아 아들 되고 땅 닮아 딸이 되지
騸馬豶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불깐 말 불깐 돼지 그도 서럽다 할 것인데
況乃生民恩繼序 [황내생민은계서] 대 이어갈 생민들이야 말을 더해 뭣하리요
豪家終歲奏管弦 [호가종세진관현]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粒米寸帛無所捐 [입미정백무소연]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均吾赤子何厚薄 [균오적자하후박] 똑같은 백성 두고 왜 그리도 차별일까
客窓重誦鳲鳩篇 [객창중송시구편] 객창에서 거듭거듭 시구편을 외워보네

 

 

영랑생가 근처의 강진군청 맞은편 남문식당에서 남도의 맛을 본다.

짧은 시간 차려지는 상차림이 정갈하다.강진답게 청자로 만든 사각의 식기를
"ㅁ"형으로 반찬을 내놓았는데 하나같이 간이 잘 맞고 음식들도 정갈하다.

 

식사를 마친 후 영랑생가로 향했다.김영랑의 주옥같은 80편의 시가 탄생한 사랑채 앞
은행나무 그늘아래서 영랑 김윤식의 시와 인생에 대하여 문화유산해설사님의
구수한 입담이 더위를 잊게 만든다.

 

 


 

곳곳에 영랑의 대표 시비들이 놓여있고 모란이 심어져 있다.

보통 풍류도의 맥에서 조선조 홍만종의 순오지에 보면
단군·혁거세·주몽· 술랑·영랑·안상· 남랑· 옥보고·김렴효· 소하대로·
산시· 김가기· 최치원·강감찬· 권진인·김시습· 홍유손·정붕· 정수곤·정희량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영랑(永郞) 등 사선(四仙)과 관련된 영랑호에서
김윤식은 호를 따왔다고 한다.

 

영랑호의 지명 전설은 이렇다.전설에 의하면 신라 때의 화랑 영랑·술랑(述郎)·
남랑(南郎)·안상(安祥) 등이 금강산에서 수련하고 무술대회에 나가기 위하여
고성군의 삼일포(三日浦)에서 3일 동안 쉬다가 금성(金城)으로 가는 길에
영랑호에 오게 되었다.

 

영랑은 호반의 풍치에 도취되어 무술대회에 나가는 것조차 잊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호수의 이름을 영랑호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서정시에 있어서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설명은
정감넘치는 전라도 사투리로 "오매 단풍 들것네" 시낭송을 해주시는데
대부분 감탄을 한다.


영랑 김윤식(1903.1.16~1950.9.29)은 강진의 지주집에서 태어나 강진보통학교,휘문의숙
(현재 휘문고)을 다녔다.성악을 전공하려고 했으나 부친의 반대(아마도 그 당시는 음악을
한다고 하면 딴따라 정도로 비하 했을 것이다.)로 영문과를 다닌다. 이후 관동대지진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작가 최승일과 교유하게 되는데 이때 최승일의 동생 최승희와 사귀며
염문을 뿌리지만 결국 실연의 아픔을 겪게된다.이때 탄생한 시가 "내 마음을 아실 이"다.


영랑은 13살에 결혼했으나 1년만에 사별하고 최승희와의 실연이후 1923년 20살에
김귀련과 두 번째 결혼을 했다.

 

 

 

"내 마음을 아실 이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그래도 어데나 계실 것이면

내 마음에 때때로 어리우는 티끌과
속임없는 눈물의 간곡한 방울방울
푸른 밤 고이 맺는 이슬 같은 보람을
보밴 듯 감추었다 내어드리지.

아! 그립다.

내 혼자 마음 날 같이 아실 이
꿈에나 아득히 보이는가.

향맑은 옥돌에 불이 달어
사랑은 타기도 하오련만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 <시문학>(1931) -
"

 

1930년 3월 시문학 창간호 발간을 주도한 박용철의 도움으로 정식 등단한다.
김영랑의 시에는 '내 마음'이라는 어휘가 유달리 많이 보이는데 그가 이 말을 많이
사용한 것은 내면의 순결성을 표현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최남선, 이광수, 노천명, 서정주 등이 일제에 꺾여나갈 때
영랑은 김정한처럼 붓을 놓고 지조를 지켰다.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광복을 맞은 영랑은 우익청년운동(지주집안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당연)에
정열을 쏟았으며 1949년에는 한때 공보처 출판국장의 관리직을 맞기도 하였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을 벗어나지 못했던 그는 지하 생활을 하다가
서울이 수복된 9월 28일 포탄의 파편에 부상을 입고 이튿날 운명하였다.

 

강진이 낳은 20세기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 영랑 김윤식선생을 비롯한 시문학파를
기리는 시문학파기념관이 생가 입구 오른쪽에 있다.

 

시문학파기념관 내부는 유독 자작나무가 많았는데 시문학파의 시에 자작나무가 많이
등장한다고 한다.

 

 

백련사와 다산초당

 

한국의 대표적인 동백숲을 지난다.야생 차밭(녹차밭은 잘 못된 표현)도 보인다.
뒤로

만덕산 보인다.2008년도 3월에 한번 등산을 했던 곳이다.옥련사에서 깃대봉을 지나
용문사까지 산행을 했었다.


다산이 태어난해와 백련사의 창건이 같은해라고 한다.

이곳은 천태사상의 백련결사를 전개했던 곳이다.그래서 대웅전 내부에 백련사(社)라고
적혀있는 부분에서 "절 사寺"와 다른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


8명의 국사를 배출한 이곳은 한마디로 말해서 송광사의 정혜결사와 더불어 요세(了世)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을 했던곳이다.

 

사람이 걸어가는 듯한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 현판글씨를 보며 추사 김정희와의
에피소드를 말씀해주셨고 이후 다산과 혜장선사의 사상과 학문에서 말이 통하는
지기를 얻고 이후 서로 오가며 길이 생겨난 오솔길은 동백숲 철학길이 되었다.

혜장선사는 다산의 학덕과 인품에 반하여 다산을 스승으로 모시며 차를 구해 극진히
대접했다고 한다.


철학로를 넘어 다산초당에 도착하였다.이미 나는 몇 번이나 본곳이지만
다산사경茶山四景(다조,약천,정석,연지석가산)을 차례차례 다시 살펴본다.

유불선에 능통한 풍류가로 조경(연지석가산만 보아도 알 수있다.)과
차를 마셨던 점은 아마도 처가인 윤선도 선생 가문의 영향도 컷을 것이다.

 

다산은 이곳에서 10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목민심서를 비롯해 600여권의 책
(여유당전서)을 저술했다.그의 사상은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실사구시의
실용적인 실학사상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돌아가신지 70년 후에 조선은
패망하게 된다.

 

우리가 일주일에 책을 두권 읽는다고 하면 1달에 8권,그리고 1년에
100권을 읽을 수 있다.1년에 책을 백권 읽으면 대한민국 1% 안에 드는 독서가이다.
그렇게 6년을 읽으면 600권이 되는 것이다.그런데 선생은 600권을 저술한 것이니
그 방대한 규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오랫동안 다산의 정신(현실에 대한 냉정한 인식,칼날 같은 비판정신,애민정신)은
그의 걸작을 통하여 계속 이어져야 한다.


백련이라 이름난 절 아름답고,
만덕산은 맑기만 한데,
문은 고요히 솔 그림자로 닫쳐 있어,
객이 오면 풍경 소리만 듣네.

돛단배 바다 위로 지나고,
새들은 꽃 사이를 날며 우짖으니,
오래 앉으면 되돌아갈 길조차 잊을 만큼,
인간세상의 흔적은 하나도 없네

- 고려 시대의 승려 혜일 선사





 

 

 

무위사

 

참 좋은 인연입니다라는 플랭카드가 걸린 무위사 일주문 뒤로
화려한 월출산이 보인다.산세에 어울리는 일주문이다.그런데 자세히 보니
석축작업을 비롯하여 한창 공사 중이었다.일주문도 최근 작품이다.

 

현존하는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극락보전이 있는 곳으로 극락보전 옆면은
예전 수덕사 대웅보전을 보는 듯 환청을 불러일으켰다.그 기품 있으면서도 고졸한
맛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극락보전 앞의 배례석도 상당히 예쁘다.

 

극락보전앞으로 스님이 꽃을 내어놓고 있었다.좌측의 기와를 보니 보수공사를
한 흔적으로 보인다.후불벽화는 별도의 뱍화보존관에 보관되어 있다.

무위사는 수륙사水陸社로 지정되었던 모양이다.그래서 수륙재(水陸齎)를
빈번하게 행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수륙재는 지상에 떠도는 망령을
부처님에 의하여 환생케 하는 재생 의식으로서 적을 포함한 전사자를 위로하는
불교 의식이다.

 

무위사가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선종 사찰에서 천태종 사찰로 그 성격이
변동되었음을 말하여 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사격의 변동은 고려후기의
천태종 백련결사의 활발한 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인근에 있는 만덕산 중심의 백련결사(白蓮結社)도 천태종의 법화신앙에
입각한 결사운동으로 무위사의 사찰 성격 변동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믿어진다.







 

 

월남사지

 

월출산의 남쪽에 있어서 월남사이며 현재는 옛절터만 남은 폐사지다.
요즘 폐사지도 관광자원으로 여겨져서 발굴 중인 곳이 많은데 이곳도 발굴 중이다.

월남사는 고려때 진각국사 혜심慧諶이 창건하였다.혜심은 자호가 무의자(無衣子)이다.

조계산(曹溪山)의 수선사(修禪社/현재의 송광사)의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제자가 되었다.
1210년 지눌이 죽자 왕명으로 수선사(修禪寺)에 들어가 그 뒤를 이어 조계종 2세가 되었다.

당시 집권자인 최이(崔怡)도 그의 명성을 듣고 자신의 두 아들 만종(萬宗)과 만전(萬全)을
보내 그를 모시도록 했고, 막대한 토지를 수선사에 시주했다. 고종은 왕위에 오르자
혜심에게 선사(禪師)를 제수하고 다시 대선사로 올렸는데, 시험을 치르지 않고 바로
승려의 벼슬에 오른 이는 그가 처음이었다고 한다.1219년(고종 6) 수선사에 있으면서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를 겸임하다가 월등사(月燈寺)에서 죽었다.

 

최이는 요즘 사극드라마 "무신"에서 합하로 나오는 최우다.최우와 기생 사이에 난 서자
만종과 만전은 무뢰승들과 어울리며 악행을 일삼는데,아마도 요즘으로 말하면
불법정치자금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나중에 김약선이 죽자 만전은 최항으로 환속한다.김준(김인준)은 최항(崔沆)이 정권을
세습하는 데 공이 있어 별장이 되었다.최항의 뒤를 이은 최의崔竩가 김준을 멀리하자
최의를 죽인다.이후 김준이 대권을 잡게 된다.

 

진각국사 혜심의 저서에 《선문염송(禪門拈頌)》 《선문강요(禪門綱要)》등이
있다.혜심은 선시를 많이 남겼다.

 

그 중 "對影그림자"라는 한시가 있다.

 

池邊獨自坐 못가에 혼자 앉았다가
池底偶逢僧 못 안에 있는 스님 만났다.
默默笑相視 말없이 웃으며 서로 보는데
知君語不應 그를 알고 말해도 대답없다.

 

진각국사비는 심하게 마모되어 비문은 일부분만 보인다.비문은 이규보가 자은 것으로
전해진다.


 

월남사지 3층석탑은 규모가 상당하다.화재로 인하여 불에 거슬렸는지 검붉은 끼가
많이 보인다.

 

강진의 사원은 여러면에서 무신정권의 비호를 받은 농장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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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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