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딩후기

짧은 가을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가을의 전령 코스모스와 구절초가 흔하게 보였습니다. 시월은 행사가 많아서 기회가 생기면 바로 라이딩을 해야 할 처지입니다. 가장 라이딩하기 좋은 계절이니 허투루 보내기가 싫습니다.

문학탐방으로 요산 김정한의 수라도 배경지인 화제리와 새미기고개 업힐을 하고 왔습니다.




1.탐방코스

사상 르네시떼 광장-낙동강 자전거 전용도로-화제나루터-토교마을-명언마을-새미기고개- 죽전마을-낙동강 자전거 전용도로-사상


2.탐방

태풍의 영향으로 아직 강가는 어수선한 구석이 많았습니다. 특히 키 가 큰 나무들이 많이 넘어졌는지 정비하느라 잘려나간 흔적이 곳곳에 보였습니다. 그러나 갸날픈 풀꽃들은 오히려 싱싱함을 드러내 주었습니다.
역사의 주인이 "민초"임을 자각시켜 줍니다.



*물금 증산리 왜성

물금 증산리왜성은 명과 일본의 강화교섭이 깨지면서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해 일으킨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 왜장 다테 마사무네가 남진하는 조.명 연합군으로 부터
부산의 본진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습니다.

"호호아지매" 매점이 있는 다리 아래에 도착하면 뒤로 보이는 낮은 산이
바로 "물금 증산리왜성"이 있는 곳입니다.증산은 부산 동구에도 있는데 "시루"의 의미입니다.
시루 "증甑" 글자를 사용하는 증산甑山은 부산 동구 도서관이 있는 곳의 지명과 같습니다. 증산甑山은 가마 부釜를 사용하는 "부산釜算"의 어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산의 증산에도 왜성의 흔적이 있으며 그 아래 성황당이 있었다는 기록이 동래부지에 나옵니다.

1481년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부산(釜山)이란 지명은 '가마꼴을 닮은 산'에서
유래했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가마꼴을 닮은 산은 동구 좌천동 금성중학교 뒷산인
증산(甑山)을 지칭하는 것이란 설이 유력합니다. 떡을 찌는 시루(甑)와 가마(釜) 둘 다 '불을 때는 그릇', 즉 취기(炊器)로 야트막한 산의 모양을 비유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증산이 아닌 수정산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근열 부산대 강사의 주장입니다.신문에 난 내용은 이렇습니다.

"수정산 산복도로 수성초등학교 뒤 능선을 따라 돌성이 있었는데, 이것을 옛날에는 '마이성(馬餌城)' '마리성(馬里城)'이라 불렀다 한다. '마이'나 '마리'는 어원학적으로 '높다, 꼭대기, 우두머리, 크다'의 뜻인
'머리'와 관련이 있다.수정산 자락엔 감골마을도 있었다. 감골이 있는 산이 바로 가마메. 다시 말해 부산이다. 이런 이유로 부산은 증산이 아니라
수정산의 다른 땅이름일 가능성이 높다.이근열씨는 수정산의 이름은 아마도 '감산', '가마메' 아니면 '머리산'이었을 것으로 본다. 머리(首)산, 수리(頂)산으로 부르다 음차해서 수정(水晶)산으로
바뀌었을 거란다. 원래 있던 산이름은 없어지고 부산이란 지명만 남은 거다."




물금 증산을 노래한 이는 동계(東溪) 윤재형(尹載衡, 1812∼1871)으로 그는 남창도감과 전결도감을 역임했는데 그의 시는 이렇습니다.

"시루처럼 볼록 솟은 들녘 가운데 산
시인들 입에 오르내리느라 한가롭지 못하네
선약(仙藥) 달이던 항아(姮娥)가 쉬는 곳
교육자 선비 오고 가는 곳

달뜨는 밤이면 밝은 빛에 씻기고
꽃피는 이른 봄엔 보라 빛 노을 고와라.
굴 속 용이 머금었던 안개 토하는데
증산은 천년토록 푸르름 줄지 않네.

[如甑聳出野中山(여증용출야중산)
浮入吟 也不閒(부입음아야불한)
煎藥 娥棲息處(전약과아서식처)
薰陶高士往來間(훈도고사왕래간)

月來夜半明輝 (월래야반명휘탕)
花發春初紫霞斑(화발춘초자하반)
一穴烟霧吐(일혈함하연무토)
孱顔千古碧無 (잔안천고벽무산)]"






*용화사

이례적으로 강가 바로 옆에 있는 사찰입니다. 사찰로 들어가니 작은 개가 연신 짖어댑니다. 보살님이 와서 진정을 시킨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합니다. 철길 아래로 난
굴다리 동굴길로 들어가면 나오는데 그 동굴길이 불이문 역할을 한다고 보면 됩니다.
수라도에서는 미륵당으로 나오는 곳입니다.산신각 아래에 두개의 반달모양의 돌은 요산 김정한 수라도에 대한 내용이고 그 오른쪽의 작은 비석은 글씨가 너무 흐릿하지만 "황산잔로비"입니다.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95호로 잔로(棧路)는 잔도(棧道)라고도 하는데
유심히 보면 황산잔도의 흔적이 자전거길에 보입니다.그냥 지나치기 쉬운 비석입니다.

묵헌 박천수의 "물금의 잔도를 지나면서"의 시 전문을 옮겨 봅니다.

"금릉(김해)을 서로 바라보며 낙동강이 나뉘는데
강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강풀은 향기롭네.
목동은 피리 불며 누른 송아지의 등을 채찍으로 몰고
고깃배의 돛대에는 백구 떼가 모이네
점심종이 바릿대에 전하니 중은 빗속에 깃들이고
저녁이슬에 옷을 적시니 객은 구름 속을 거니네.
나무 사닥다리와 흙의 다리는 어제와 같은데
지금도 옛 노인은 비문을 외우네.

[金陵西望洛江分(금릉서망낙강분)
江雨江草芬(강우비비강초분)
牧笛鞭驅黃犢背(목적편구황독배)
漁舟竿集白鷗群(어주간집백구군)
午鐘傳鉢僧棲雨(오종전발승서우)
夕露沾衣客步雲(석로첨의객보운)
木棧土橋如昨日(목잔토교여작일)
至今故老誦碑文(지금고노송비문)]"



산신각 측면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고 산신각의 주인은 할배산신입니다.




*梁山龍華寺石造如來坐像

용화사 석조여래좌상이 있습니다.뒤의 광배도 보존이 잘되었고 불상 아래 좌대도 볼만 합니다. 보물 제491호입니다.절은 석조여래좌상이 있는 대웅전,산신각,요사채로 단촐하여 아직은 암자의 느낌이 더 강합니다.

600여 년 전인 14세기 무렵, 강 건너 김해의 고암마을에 살던 한 농부가 낙동강에서 무언가가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기이하게 여겨 건져 내 보니,
바로 이 석조여래좌상이었다고 합니다.불상은 김해의 상동면 감로리에 있는 옛 절터에 모셔두었는데, 통도사의 성옥 스님이 용화사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원래는 노천에 모셨다고도 하고,
또 다르게는 낙동강 변에 나뒹굴고 있었다고도 하는데,
1947년 용화사 법당을 중수하면서 주존으로 봉안했다는 이야기는 겹칩니다.

석조여래좌상의 뒤쪽 벽에는 붉은색으로 채색된 아미타불회도가 있습니다.
선정에 든 아미타여래를 중심으로 보살과 제자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석조여래좌상의 광배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습니다. 1849년에 금암당 천여, 응월당 선화, 채종, 두성, 완기 등
다섯 사람이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수라도 소설에서는 가야부인이 땅에 묻힌 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근처 임경대 를 소개한 곳에 고운 최치원의 임경대 시가 적혀 있습니다. 경주 최씨는 (孤雲)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로 합니다.




* 경파대

매촌 정임교가 경파대라고 명명한 곳입니다.



*화제나루터

수라도 초반부에 보면 가야부인이 시집을 오면서 배를 타고 이곳 나루터까지 오는 과정은
실로 스펙타클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태풍에 가까운 바람이 불고 파도가 쳐서 배에 탄 이들이
초죽음이 되는 과정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지금 가보면 낙동강이 유유하게 편안한 풍경이지만 예전에 낙동강 하구둑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바닷물이 삼랑진까지 역류했다고 합니다.삼랑(三浪)이라는 명칭 자체가 "3가지 물결"인데
낙동강물,밀양강물,역류한 바닷물 3개가 합쳐져 삼랑이며 이곳에 나루 진津이 합쳐져
삼랑진이라는 지명이 됩니다.갈대꽃이 만발합니다.



굴다리 아래로 통과하고 나면 토교마을입니다. 토교土橋는 말 그대로 흙다리라는 의미입니다. 장마비에 흙다리가 떠 내려가 돌다리(石橋)가 만들어지는데 그것을 기념한 비석이
자전거 도로 옆에 있습니다. 이름하여 "양산 화제 석교비"입니다. 영조시기입니다.



가야부인과 오봉선생의 주무대인 명언마을입니다.보호수가 여럿 보이는 곳입니다.





명언마을을 지나 새미기고개까지 업힐을 합니다. 새미기고개는 선암산 매봉과 토곡산을 이어주는 고개입니다."새미기"는 "새의 멱"이니 곧 새의 목이라는 의미입니다.새의 목처럼 생겼다는 의미인데 목의 방언인 멱이 붙어 '새멱', 사실 이보다는 더 촌스러운 이름이 바로 '새미기'인데 촌스럽지만 정감은 더가는 지명입니다.





화제의 바깥에 위치하는 곳이 외화마을인데 외화교 다리에도 수라도의 설명이 있고
이 외화교를 건너면 바로 죽전마을입니다.소설에서는 "대밭각단"으로 나옵니다. 여기서 "각단[각딴]"이란 "한동네 안에서 몇 집씩 따로 모여 있는 구역"을 말합니다.
어릴때 제가 사는 곳에서도 "안각단(=안쪽 마을)"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습니다.
실제 죽전마을은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뒤쪽으로 대나무가 가득합니다.





수라도에서 가장 풍류인을 닮은 사람은 가야부인입니다. 유교와 불교 모두 포용적인 자세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유교와 불교 모두 포용하듯이 열린 풍류도인은 원효,최치원,이제현,함허득통,
초의,김시습,이율곡,함석헌 등입니다.원래 풍류교는 유불선 삼교를 이미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종교를 넘어선 경지입니다.원효는 불교를 넘어선 참종교인입니다.원효는 유식계의 일심(一心)과
반야계의 삼공(三空)의 세계를 하나로 융합하였습니다.이는 흡사 격에 들어가서 그 격을 넘어선
격의 예술인의 경지가 있으니 바로 추사 김정희와 비슷합니다.
통달 한후 추사체를 만들어내죠. 여기에 멋이 있습니다.
율곡은 유교와 불교에 통달했습니다.법명은 의암입니다.김시습은 설잠이라는 법명까지 있는 불교인이지만
역시 유교에도 통달했으며 신천옹 함석헌은 역사의식과 기독교를 같이 본 참종교인입니다.

함석헌에 대한 평가로 "고난을 구체적으로 짊어지고 역사를 이끌어 온 존재는 지배층이 아닌 민중이다.
고난의 역사의 주체자는 민중이다. 이 민중을 신천옹은 “씨알”이라 했다. 씨는 생명을 내포하고 있어
새로운 생명을 출발시키는 불사의 존재이다."라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유교는 인간의 사는 길 위에 펼쳐져 있고, 불교도 사람 사는 길 위에 전개되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모퉁이도 만나고 교차로도 만납니다. 유불 교류는 교차로에서 만나는 소통에 해당합니다.
이 소통에는 상호 이해를 위한 일차적 만남이 있고, 한쪽 길에서 다른 쪽 길을 저울질 하고 평가하려고
드는 통변의 만남이 있습니다.

바람의 세계, 곧 풍류의 세계, 풍륜風輪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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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람처럼, 흐르는 물처럼
어진 산처럼,방랑의 은빛 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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