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생각]
 
지금 이 세상에 대홍수가 일어나서 세상의 만물이 모두 사라질 상황이라 가정하자. 나에게 노아의 방주와 같은 거대한 배가 있다면 이 배에 <사람-동물-식물-무생물>을 태우거나 싣고 싶다면 각각 어떤 사람들, 동물들, 식물들, 무생물들을 선택하고 싶은지 확정하고 그 이유를 서술하시오. 
 

 
 
 
1. 서론
 
 
 
세상의 만물이 사라질 상황은 삶을 살아가는 동안 한번쯤 고민해 볼만한 주제다. 이런 인문학적인 주제는 해답이 없다. 나의 주장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쉽게 생각하면 내 생각만 밝히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상대방의 의견이 틀렸다고 주장하지 않는 예의는 필요하다고 본다.
 
 
 
한때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역설적으로 “유서 쓰기”를 해보면서 그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다. 유서라는 것은 내가 죽으면 세상 만물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하고 생각하면 개인적인 정리로 마무리된다. 나를 중심으로 내 안에서 끝을 내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 멸망 같은 시대에 노아의 방주 같은 탈출용 배에 무언가를 싣는다는 것은 나와 연결된 나의 밖의 환경과 연결되어야 한다. 더욱 적극적인 생존 활동이 되는 것이다. 거대한 배에 무엇을 싣고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인류의 영원한 생존과 관련이 깊다.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의 사망률은 100%이며 “생자필멸(生者必滅)”을 직간접으로 체험하며 그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나는 죽겠지만 나의 자손이 이어져 인류가 이어지듯이 인류의 영원한 생존은 나 자신의 생존보다는 인간의 DNA를 비롯한 지식과 문화를 보존하며 계승 발전시키는 행위와 연결된다고 본다. 과연 세상 만물이 모두 사라질 위기는 어떤 순간일까를 먼저 과학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2.본론
 
 
 
나는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노아의 홍수는 있었다고 본다. 아마도 빙하가 녹는 해빙기에 있었을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합리적인 추론을 해본다. 다만 노아의 방주는 왜곡되거나 부풀려졌을 가능성도 크다고 본다. 요즘으로 치면 중동지방에 국지적인 홍수가 제법 크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그렇지만 “노아가 나이 600세가 되던 시절에 발생했다”에서 600세를 의심하게 되고 홍수가 “1년 10일간” 이루어진 점도 수긍하기 힘든 점이 있다. 노아의 방주는 아마도 옛날이야기 정도로 치부하고 그 속에 담겨진 교훈을 새기는 정도가 적당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원래 기독교는 선과 악이라는 다소 이분법적인 주제가 강해서 이야기 플롯에서 선과 악 이외의 것은 뺀 것으로 보인다.
 
 
 
“휴거”라는 이름으로 사이비 기독교 교회가 문제를 일으켜 지구 종말이 1992년에 일어난다고 했지만 거짓이었다. 마찬가지로 딱 어느 때 지구가 멸망한다고 정해놓고 노아의 방주를 준비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가상의 상황이다. 미래를 예측까지 해야 한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다. 예측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이미 수많은 지구멸망과 같은 충격이 있었다. 세월호 사건, 동일본 대지진 같은 일이 예측 가능했다면 노아의 방주를 만들 필요도 없이 그냥 피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2가지 전제조건을 생각 할 필요가 있다. 지구멸망이 생기고 또한 그것이 예측 가능해야만 대책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럼 과학적으로 가장 신빙성 있는 지구멸망은 언제일까? 지구도 살아있는 생명체다. 생자필멸이니 지구도 언젠가는 죽는다.
 
 
 
2014년 6월초에 “덕암리 암각매향명” 문화유산답사를 가서 느꼈던 지구멸망을 생각해 본적이 있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 56억 7천만년이 되는 때에 다시 사바세계에 출현하여 화림원(華林園)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교화한다고 한다. 이 법회를 '용화삼회'라고 하는데,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기 이전까지는 미륵보살이라 하고 성불한 이후는 미륵불이라 한다.
 
 
 
2014년 그 당시 나는 내쇼날지오그래픽의 "코스모스"를 보았다. 코스모스 11화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빅 히스토리, 코스모스 –불멸을 꿈꾸다“이다. 여기서 ”불멸“이란 ”생존의 연속“을 의미한다.
 
 
 
그때 그 영상의 요점은 이렇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먼 미래에 천문학적 사건들을 예측할 수 있다. 그 중 하나가 태양의 죽음이다. 약 50억년 후 우리 태양은 ,자신의 핵연료인 수소를 소진하고, 적색거성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의 지성을 잘 활용한다면, 그렇게 먼 미래에 우리의 후손들은 이미 오래전에 이 태양계를 떠났을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나는 머릿속을 지나가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지성”을 불교식으로 말하면 "반야"이고 그 우주선은 “반야용선”이지 않을까? 반야용선이 우주선이라면? 하는 자유로운 상상을 한 것이다.
 
 
 
생뚱맞지만 “태양소멸 되기 전 약50억년”이라는 것과 불교의 56억7천만년의 유사성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불교식으로 다시 말해 계산하면 2014년은 불기 2558년이니 56억 4000여년이 남은 셈인가?
 
 
여하튼 태양은 초신성이란 단계를 거치지 않는다. 초신성이라는 단어자체가 '죽기 전의 항성'이라는 뜻이다. 즉 태양 질량의 약8배가 넘는 항성이 모든 수소와 헬륨(helium)을 태워버리고 죽기 전에 초신성을 거치게 된다. 태양이 50억년 후에 수소가 다타버리고 헬륨만이 핵융합반응을 일으킨다. 이때 태양은 끝없이 부풀어 오른다. 이때가 적색거성이고 다음은 지구정도의 크기로 작게 수축되는데 중력이 굉장하게 된다. 이때가 바로 백색왜성이다. 헬륨은 원소주기율표 상에서 1주기 18족에 속하는 비활성기체로 우주에서 수소 다음으로 많은 원소이다.
 
 
태양은 생명을 다하게 되고 그 수명에 맞추어 지구에 사는 인류도 그 이전에 다른 행성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여하튼 50억년,56억년이라는 유사성을 생각해보면 불교의 과학성(?)이 좀 더 심오해진다.
 
 
종교에 과학을 접목시키면 오히려 사이비가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불교는 접목할수록 맞아떨어지는 경향이 강하다. 석가모니 한 사람의 지혜가 이 정도라면 어쩌면 석가모니는 그때 유행했던 “별에서 온 그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반야용선 같은 우주선에는 무얼 실어야할까? 우선 나 같으면 영화 “마션”의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생존력이 강한 “물리학자”를 모시고 싶다. 생물학자, 인류학자도 모시고 싶다. 그리고 그 시기라면 아이언맨의 “자비스”같은 인공지능이 더욱 발전되어 있을 것이다. 자비스의 빅데이타는 인류의 모든 문화유산을 포함한 인류의 가치가 고스란히 들어가면 좋겠다. 그래서 무생물은 인류의 지식을 모두 담은 인공지능을 우주선에 탑재하고 싶다. 또한 지구의 모든 동식물의 DNA와 그것을 복원할 수 있는 기술을 가져가고 싶다. 다른 것에서 인류가 다시 시작할 공간과 환경이 주어진다면 다시 복원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사람은 물리학자, 생물학자, 인류학자 2)동식물은 DNA와 복원기술 3)무생물은 인공지능 시스템이 탑재된 우주선이면 될 것 같다. 나의 인간후배들에게 막중한 사명을 넘긴다.
 
 
 
 
3.결론
 
 
 
그러나 나는 지구를 떠나고 싶지 않다. 사실 나는 이렇게 상상해 본다. “전생”이라는 별에서 “지구별”로 소풍을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전생탈출”을 한 사람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전생을 믿지도 않는다. 사후세계의 극락과 천당 혹은 지옥도 믿지 않는다. 지구별을 아끼지 않으면서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한다는 것은 또 다른 파괴행위를 하겠다는 약탈 심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사후엔 나는 무(無로) 돌아간다고 본다. 그러나 현생에서 죄를 짓는다면 그곳이 곧 지옥이 될 것이다. 지금 생존하고 있는 이 지구별이 천당도 되고 지옥이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생존하고 있는 이 지구별에 소풍을 왔을 수도 있고 지옥체험을 하러 왔을 수도 있다고 본다. 결국 그것은 나의 생각과 행동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연결의 출발점은 나 자신이다. 올해에 본 영화 “너의 이름은. 君の名は。”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일본어로 매듭을 뜻하는 "무스비(結び)" 라는 단어는 이 영화에서 반복되는 핵심이다. 미즈하의 할머니는 교차했다가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고 만들어지는 실짜기 작업처럼 사람과 사람의 인연이란 무스비 같은 것이고, 또한 우리가 먹고 마신 것이 몸속에 들어와 다시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 또한 무스비라고 얘기한다.“
 
 
 
"이 영화에서 묘사되는 이토모리 마을의 재난은 2만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을 상징하고 있다. 당사국인 일본국민들의 충격은 영원히 잊지 못할 상처로 남았고 지금까지도 일본은 그 사건으로 인해 많은 것이 바뀐 상태이다.
 
 
 
신카이 감독은 그 사건을 생각하며 '그런 일이 만약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죽지 않았더라면... 내가 그들을 살릴 수만 있다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결과물인 영화 [너의 이름은] 에는 일본인들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졌으면 하는 감독의 진심어린 기도와 바램이 눈물나도록 절절하게 담겨있다. 나의 경우 세월호에서 숨져간 생명들을 떠올리며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되었다. 이름을 일본어로 "나마에(NAMAE)"라고 하는데 왠지 영어의 "네임(NAME)"과 스펠링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도 무스비인지는 모르겠다.
 
 
 
이토모리 마을의 재난이나 동일본 대지진을 경험한 사람에게 이미 지구멸망과 같은 상황이다. 문제는 예측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노아의 방주 같은 것을 만들거나 탈출할 수 있는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다.
 
 
 
또한 능력면에서 가능해야 한다.
 
 
 
어떻게 보면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무섭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다. 구치소에 수감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생각해 보자.
 
 
 
한때 대통령이었지만 그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이 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본인도 본인이지만 주변에 기생하며 간언하던 친박, 골박하는 사람들이 더 나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직언하기 보다는 폐족되지 않기 위해 끝까지 죄 없다고 무리수를 두게 꼬드긴 측면도 보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결국 간신인지 충신인지 알아보는 눈은 박근혜 전대통령 본인이 가지고 있어야하는데 원초적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본인이 충언을 배신으로 받아들이는 DNA로 장착되어 있었으니 모든 것은 박근혜 본인에서 잘 못된 것이다.
 
 
“엄마 아비 없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박근혜를 찍었던 나이 드신 분들이 결국 수감자 박근혜 전대통령을 더 불쌍하게 만든 측면도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 박근혜 전 대통령 본인자신의 책임이 크다. 탄핵과 구속까지 안갈 수도 있는 모든 길을 버리고 교도소로 간 측면도 있다. 그만큼 사리판단에 있어서 무능력한 모습을 보였다. 대통령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대통령이 된 후 그동안 순방이라는 이름으로 해외여행을 하며 역마살을 키워왔기 때문에 감방생활은 더더욱 비참하고 힘들게 느껴질 것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이 있다.
 
무게를 못 견딜 정도로 능력 부족, 내공 부족이라면 왕관이 오히려 독이 된다.
 
 
 
이런 측면에서 나를 되돌아본다.
 
 
 
나는 인류를 비롯한 지구의 생명체와 지구의 모든 것을 구원할 능력이 못되는 사람이다. 나는 나를 아는 사람이다.
 
 
나는 증권사의 랩(Wrap) 매니저이다. 쉽게 생각하면 펀드 매니저와 비슷한 일을 한다. 나를 중심으로 내 속의 탐욕과 공포를 이겨내야 하고 세상이 나에게 숙제처럼 던져지는 질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며 살고 있다. 매니저는 2가지 길이 있다. 미래를 잘 예측하여 큰돈을 버는 사람과 다른 한명은 미래 예측엔 별로 관심이 없고 적정주가 대비 저평가된 주식을 매수하여 적정 수익을 올리는 현재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마켓타이머로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같은 사람이다. 미래를 잘 예측하지 못하면 미래를 만들어 버리는 사람이 있다.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인류의 0.024(2.4%)에 해당하는 혁신가(이노베이터)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97.6%에 드는 평범한 사람으로 1년 뒤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투자하는 사람이다. 마켓리액터 워렌버핏처럼 미래를 예상하지 않는다.
 
 
 
예측은 맞아떨어지면 엄청난 수익률로 큰돈을 벌지만 사실 예측은 잘 맞지 않는다. 예측이 아닌 대응을 하는 것은 큰돈을 벌지 못하지만 실패 확률이 낮다는 장점이 있다.
 
 
 
세상에는 쉽게 수익을 올려주는 “마법의 공식”은 어느 정도 존재하지만 사실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내심이 부족하면 많은 것에 현혹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는 가장 혹독한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인내심을 키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쉽게 이뤄낸 것을 마치 자신이 천재인 듯 오해하게 되면 자신에게 발생한 일을 '탓'한다. 모든 문제의 원인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외면하게 된다. 그래서 하루하루 아니 매시간 치열하게 살아가야 한다고 본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일은 내가 아닌 세상이 나에게 일시적으로 맡겨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행을 바라는 것 보다 정도로 가는 것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자리가 있어서 나를 반야용선에 태운다면 나는 “버큰헤이드 전통"에 따른 위기 시 구조순서대로 태울 것이다. (끝)
 

- 김영한(일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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